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작나무 Jan 29. 2020

7. 문득 돌아보면 희망이 곁에 있을지 모른다

#7 - 5월 27일 저녁놀 캠핑장~ 츠키미 산 어린이 숲 (月見山 こど

새벽 4시쯤 깼다. 깊은 산속에서 혼자였지만 편히 잘 잤다. 일찍 텐트를 걷고 짐을 꾸린 뒤 빵을 굽고 커피까지 곁들여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가지고 간 캠핑용 토스터는 제법 유용했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니 저녁에는 어딘가 숙소를 구해 정비를 해야겠다 싶었다. 무로토 관광도 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일단 길 위에 서면 쫓기듯이 달리게 된다. 반드시 해치워야 할 과제라도 있는 것처럼 맹목으로 치닫는다.


채 7시도 안 돼 캠프장 관리인이 미니  밴에 개를 싣고 출근했다.  밤늦게 도착했고 전화번호가 없어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캠핑장 사용료를 내겠다고 하니 의례적으로 살짝 뭐 그냥 가도 좋다는 제스처를 한다. 한국사람에 대한 인상도 의식돼 굳이 돈을 내겠다고 하니 그러면 1,000엔이라며 영수증까지 끊어주었다. 샤워를 하겠냐고 묻기에  간밤에 취사장 수도가에서 했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괜찮다고 말하고 화장실을 쓰고 싶다니  샤워장과 화장실이 있는 관리동 셔터를 올려주었다.

새벽같이 캠핑장 관리인이 올라왔다.

간밤에 아무리 찾아도 콘센트를 찾을 수 없었기에 충전 가능하냐? 물으니  관리동 사무실 안 콘센트를 안내해주었다. 스마트폰과 카메라가 충전되기를 기다리며 관리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숙박계도 쓰라고 해 한자와 가타가나로 한국 주소를 기입하니  한국사람이 어떻게 한자를 쓸 줄 아냐? 따로 공부했냐?고 묻는다. 한국도 한자를 쓴다. 다만 일본과 읽는 게 조금 다르다. 한국은 겨울이 춥냐? 아무래도 북쪽이니까. 이 근처에 한국 중고등학교 야구 선수들이 겨울에 훈련하러 온다.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다. 이무렵일본에는 쓰유(梅雨, 매화 필 무렵에 오는 일본의 장마)가 있으니 준비를 해야 한다. 서툰 일본어로 이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7시 30분, 짐을 챙겨 출발했다. 갈림길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정상에 있는 전망대 입구까지 걸어 올라가 보았다. 올라가 볼 수만 있다면 무로토곶에서 태평양을 향해 뻗어간 경치가 시원했을 텐데 무슨 이유인지 폐허로 방치돼 진입이 불가능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지방 인구감소 때문일 것이다.

코보 대사가 수행했다는 천연동굴. 24번 사찰 인근 바닷가에 있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어제 저녁 스쳐 지나간  24번 사찰 호츠미사키지(最御崎寺)에 들러 참배했다. 코보 대사가 19살 때 절 아래 있던 천연동굴(미쿠라도우)과  문화재를 전시한 미술관까지 있는 꽤 규모가 큰 절이었다. 무로토 미사키(곶)를 돈 기념으로 모처럼 납경을 받을까 싶었지만 납경첩을 주차장에 세워둔 자전거에 두고 올라온 탓에 포기했다. 이 절에도 붙임바위가 있었다. 아마도 우리 동네 부암동(付岩洞)도 아이 갖기를 기원하던 붙임바위에서 동네 이름이 유래했다던데, 아마도 비슷한 염원들이 바위에 저렇게 굵고 선명한 흔적을 남겼으리라.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밤새 전화가 불통이라 걱정했다며 반가워 했다.   


절 앞 벤치에서 헐거워진 킥스탠드 나사를 조이고 9시가 다 돼 다시 출발. 어제 저녁 막막한 심정으로 오르던 비탈길. 오를 때 힐끗힐끗 돌아보며 바다를 보긴 했지만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리막을 달리며 마주 보자니  일망무제의 태평양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같은 곳이지만 대하는 마음이 이렇게 다 수 있구나 싶었다. 설령 절망속을 헤매는 때가 오더라도 가끔은 뒤를 돌아 보기로 하자. 이렇게 멋진 광경같은 축복이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한 고빗사위를 넘어서는 중일지라도 이내  능선에 올라서면 탁 트인 전망을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목조주택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무척 조용하고 깨끗한 시가지를 지났지만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지나친 게 아쉽다. 마을마다 대개 우체국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국민학교 3, 4학년 이후 한동안 우표수집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기념우표가 나오는 날이면 우체국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사다 모으곤 했다. 광복 30주년, 가봉의 봉고 대통령 방한 기념,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기념우표를 사던 기억이 선명하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취미와 결별했는데, 그 무렵 진해에 살던 고종사촌 형이 서울에 놀러 와서는 내 우표책을 부러워하니까 막내형이 선물로 주라고 했다. 잠시 망설이다. 빼곡하게 정리돼 있던 우표책 두 권을 통째로 줘버렸다. 그 가운데 한 권은 빨간 표지에 갈피마다 유산지가 덮여있는 꽤 고급스러운 것이었다.돈암동 로터리에 있던 우표 가게에서 600원쯤에 팔던 것이다. 라면이  20원 할 때였으니 지금 시세로 3만 원쯤 했을까? 내가 돈을 모을 길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 구두를 닦아두면 기특하다고 10원이나 20원을 주시곤 했지만 그 외에 돈을 모을 길이 없었다. 며칠 망설이다가 아버지께 우표책을 정말 갖고 싶다고 고백했다. 아버지는 내게, 한자를 1000자 외우면 우표책을 사주시겠다고 하셨다. 한 자를 10번씩 쓰면 외운 것으로 쳐주겠다고 하셨다. 오로지 우표책을 갖겠다는 일념으로 1974년 여름방학 동안 외롭고도 고독하게 한자 쓰기를 했다.  천자문이나 그런 책이 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동네 중학생 형들 한자 교과서를 빌려다가 옥편을 찾아 일일이 음과 훈을 달면서  쓰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나는 700자가량을 쓰고 외운 것 같다. 그랬는데도 아버지가 그 우표책을 사다 주셨다. 그런 우표책을 고종사촌에게 다 넘기면서 뭐랄까, 나는 유년시절과 결별하는 어떤 의식을 치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이듬해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셨고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지금도 뭐 대단한 한자 실력은 아니지만, 중고등학교 때 한자 투성이 인문교양서들을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우표책에 대한 열망 덕분이었다.


 26번 곤고쵸지[金剛頂寺]나  27번 고노미네지(神峯寺).  두 곳 모두  높은 곳에 있다고 하니  절대 무리하지 말고 급경사에서는 걸어서 올라가야지 마음먹었다.  뜻대로 잘 될지는 모를 일이다. 25번 신쇼지(津照寺)까지는 지극히 평탄한 해변길로 6.5 km쯤 달리면 된다. 절 앞에서 승용차로 순례하는 노 부부가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88개 사찰 순례를 자전거로만 하느냐며 대단하다고 일흔 살쯤 돼 보이는 부부는 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절들을 순례하고 있어 여유 있어 보였다. 절 앞에 있는 가게(헨로노에키遍路の駅)에서 물 2리터(260엔) 향 한 통(560엔)을 사고 갓 튀긴 크로켓 (102엔)를 사 먹었다.

신쇼지(津照寺)는 바닷가 절답게, 풍랑으로 침몰 위기에 처한 어부들 앞에 지장보살이 나타나 배를 안전하게 인도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절이다. 26번 곤고쵸지(金剛頂寺)도 신쇼지(津照寺)에서 불과 3.8 k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러나 1.5 km 가량 해안도로에서 우측 마을로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절 아래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올라갔다. 이 절에는 이 부근에 살던 상상 속 괴물 덴구(天狗)가 사람들을 괴롭히자 코보 대사가 타이른 뒤 다시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참배를 마치고  해안 쪽으로 내려올 때 조금씩 비가 뿌렸다.마음이 바빠졌다. 인근에 이사노사토라는 휴게소(미찌노에끼 道の駅)가 있다고 해 쉬어가려고 들렀지만  월요일 정기 휴일이라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바닷가 벤치에 앉아 마시며 잠시 쉬었다. 이 때,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부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해안도로에서 자전거로 달리는 것을 보며 따라온 모양인지 천진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웃는 얼굴로 나를 향해 다가오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자전거 타는 시늉을 해 보인다. 88개 사찰 순례를 모두 자전거로 해요? 와 대단해요. 이런 말을 나눈 뒤 오세타이(お接待)라며 천 엔짜리 지폐를 준다. 받아도 될지  당황스러웠다. 시코쿠섬 사람들은 순례자들을 코보 대사와 함께 걷는 존재, 또는 코보 대사의 현신이라고까지 여긴다고 한다. 순례자(오헨로御遍路)를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에게 시주를 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자기 집에 데려다가 먹이고 재우는 것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몇 번 거절했지만  '꼭 받아주세요. 가면서 음료수라도 사 드시면 고맙겠어요.' 더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남에게 신세 지는 일을 잘 못 하는 내게 아내는 '남들에게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상대를 위하는 길이에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뜻밖의 오세타이를 받고 조금 더 달리다가 또 다른 쉼터에서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 역시 어젯밤에 많이 지어둔 밥을 후리가케와 한국에서 가져온 김으로 주먹밥을 만든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화장실과 수도만 있다면 얼마든지 노숙을 하면서도 순례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이 신도(神道)의 나라라는 것은 가는 곳마다 실감할 수 있다.  조금 특이한  자연지형에는 일주문과 비슷한 토리이(鳥居)나 작은 당집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일본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된 토리이는 코우보오 대사가 신성한 공간과 일상의 공간을 구분하려고 세운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비는 내리지 않고 하늘만 잔뜩 흐려있었다. 길가에 있는 빵집에서 빵을 몇 개 사서 (6백엔) 패니어에 넣고 조금 더 달린 뒤 후도이와(不動岩)미찌노에끼 (道の駅)에 있는 편의점 스리에프에서 커피우유 하나를 사서 단팥빵과 함께 먹었다.


 27번 절 고노미네지(神峯寺)는 고도가 높대서 잔뜩 긴장했다.  뭔가 먹고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초조감도 있었다. 이 절은 고노미네산(神峯山 596m) 정상 가까이에 있었다. 26번 절 곤고쵸지(金剛頂寺)로부터 31 km. 해안도로로부터 3.4 km 내륙 쪽으로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자전거로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오른 뒤, 또다시 자전거를 세워 놓고 도보자 순례길로 올랐다. 절은 해발 500m 지점에 있었다. 길가에 마무시(マムシ) 주의라는 말이 쓰여있어 사전을 찾아보니 살모사라고 한다. 절마다 입구에 있는 인왕문에  간절한 마음들이 매달려 있다. 짚신도 있고 천 마리 학도 있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표현했는지  I ♡MOM이라고 쓰여있는 주머니를 보자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났지만 나 역시 어머니와 온전히 이별하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머물렀다.

가파른 계단 155개를 올라야만 본당과 대사당에 다다를 수 있다.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에 산에서 내려오는 약수가 있었다. 고노미네지노미즈(神峯寺の水)라는 이 약수는 코보 대사가 중병을 앓던 여인의 꿈에 나타나  마시라고 일러줘 시키는 대로 하니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나도 물을 양껏 마셨다. 


오후 3시 반. 고노미네지(神峯寺) 참배를 마쳤다. 이제 잠자리를 찾아야 할 시간이다. 직선거리 27km 떨어진 곳에 츠키미야마(月見山) 어린이 숲 (月見山こどもの森) 야영장 있다고 해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 지도상으로는 바닷가 가까운 곳 얕은 언덕 위에 있다고 표시되었다.

오야마 미치노에키를 지나  야영장이 있다는 고난시(香南市)를 10 km 앞둔 지점, 아키 시(安芸市)에서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마트 두 곳에 들러 계란 한 줄(150엔)과 돼지고기 212그램( 207엔) 우유 1리터 물 오징어 한 마리 (98엔) 양상추 반 통 (58엔) 미소라멘 5개 덕용포장 (120엔) 이렇게 장을 봤다. 뭔가 대단한 저녁을 지어먹을 것처럼 들떠 있었다.

해안으로 아름다운 자전거길이 뻗어있었다. 송림 속으로 1 km 가량 조용한 길이 이어지기도 했다.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지만 오르막도 없고 자동차 길과 완전히 구분된 자전거도로라 마음은 가벼웠다. 자동차 도로가 는 산 위로 새로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옛길을 자전거길로 낸 것 같았다.

바닷가 솔숲에  있는 니시번 젠콘야도는 잠겨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어딘가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연락하면 관리자가 와서 열어주기도 하는 모양인데 당시에는 모르고 지나쳤다. 고난시 야스(夜須) 역에  저녁 여섯 시가 넘어 도착했다. 역은 해변 공원 앞에 있었다. 역 앞에는 꽤 규모가 큰 미찌노에키도 있고 그 너머에는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먹을 것도 충분하고 이제 야영장에 가서 텐트를 치고 편안한 야영을 하면 된다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야스역을 지나  2 km쯤 달린 뒤 야영장을 향해 우측에 보이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인근에 자위대 훈련장이 있다는 표지판이 있다. 산 뒤편으로 돌아 들어가 오르막을 한 동안 올라야 했다. 산 뒤로 돌아들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음산해지며 어째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을이나 건물도 안 보이고 산길 초입에는 공동묘지만 어둠 속에 펼쳐져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생각하며  숲길을 힘겹게 올라갔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캠핑장이라고 표시된 지점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건물들도 폐허는 아니지만 너무 낡았다. 다행히 화장실에는 자동 센서가 있는지 불이 들어왔다. 예의 화장지도 구비돼 있고 청소도 말끔히 돼 있다. 어디를 가나 화장실은 예외 없이 잘 관리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  산 위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어제 캠핑한 저녁노을 언덕 캠프장과는 사뭇 다른 음습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태풍이라도 불어오려는지 바람이 거세게 불어 어둠 속에서 나무들이 진저리를 치듯 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쉽게 짐을 풀지 못한 채 일단 관리동 앞에 작은 수도가 있어 그 앞에서 바람을 가린 채 버너를 피워 밥을 지었다. 이 음산한 곳에서 혼자 잠을 자야 할지 망설여졌다. 자전거에서 패니어와 랙팩을 풀지 않고 버너와 식량들만 꺼내 저녁을 차렸다. 일단 밥을 짓고 물 오징어를 그대로 구워서 남은 밑반찬들과 함께 허겁지겁 먹었다. 계란을 한 줄 다 삶아 두었다.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어둔 건물의 창틀들도 덜컹덜컹 흔들렸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 4,50m쯤 떨어진 지점으로부터 손전등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안내인이 있구나 내심 반가운 마음에 나도 라이트를 켜서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천히 다가오던 불빛이 내 불빛을 본 뒤에 황급히 숲 속으로 숨어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이게 뭐지?  이때부터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며칠 동안 자전거 핸들과 브레이크를 쥐고 달린 데다 긴장한 탓인지 근육이 곱아져 손가락 끝으로 물건들을  잘 집을 수없는 상태였다. 허둥대다 보니 헤드램프 스위치를 끄려고 해도  눌러지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상대는 라이트를 끈 채 뭔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나는 불빛 아래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꼴이었다. 라이트가 눌러도 꺼지지도 않아 그대로 주머니 속에 넣어 일단 불빛을 가렸다. 도저히 여기서 잠을 잘 수는 없겠다 싶어 허겁지겁 랙 팩에 짐을 주워 담고 황급히 그 음산한 언덕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바닷가 야스(夜須) 미찌노에키까지 어떻게 달려내려 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낯선 이국의 거리지만 사람들이 있고, 불빛 속으로  들어오니 일단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게 전혀 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상스레 음산 분위기가 나를 겁먹게 만들었다. 미치노에키에는 불이 환했지만 상점들은 이미 모두 문을 닫았다. 마을에 여관이 있으면 가서 자야겠다 싶어 왔던 길을 되짚어 가보았지만 아무 정보도 없이 야밤에 여관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미치노에키에서 다른 순례자들처럼 노숙을 해보자 싶어 가보았다. 그러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자동차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그곳에서 편히 자기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막막한 심정으로 해변으로 들어가 보았다. 해변을 따라 나무 데크가 깔려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자전거 라이트를 켠 채 해변길을 달리다 보니 곳곳에 한 몸처럼 끌어안고 있던 아베크족들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바로 라이트를 끄고 해변 공중 화장실 가까이 바닷가에 텐트를 쳤다. 취사장인지 간단한 비가림 지붕도 있어 맞춤하다 싶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었다. 야영이 허용된 곳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싶었다.

도대체 그 산속의 불빛은 무엇이었을까. 차분하고 가지런한 파도소리.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새벽녘에 몇 차례 비가 쏟아졌다. 지붕 있는 구조물 아래 텐트를 치기를 잘한 것 같다. 꿈결에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7일 - 5월 27일  저녁놀 캠핑장~ 츠키미산 어린이 숲 (月見山 こどもの森)

운행 87.6 km

이전 06화 6.욕망의 노예로 살 것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