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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02. 2020

8. 폭우속에 길을 잃다

#8  고난시(香南市) 해변~고치시 호텔


새벽에 돌풍이 불고 비가 쏟아졌다. 텐트가 심하게 흔들렸다. 텐트 위에 튼튼한 지붕도 있고 안전하다 싶어  일견 안도감을 느껴졌다. 4시 반쯤 일어나 텐트를 정리했다. 비가 와도 다섯 시부터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그들은 자전거에 짐을 꾸리고  있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쳤다. 날이 밝으면서 비는 그쳤다. 이국의 낯선 곳이라 좀 더 예민해지긴 했지만 남들에게 방심한 채 자는 모습을 보이는 건 어릴 때부터 꺼려졌다. 아침 6시. 야스(夜須)역에 나가보았다. 안내센터 문에 9시 반에 문을 열고 와이파이도 가능하다고 쓰여 있었다.


 예정에 없는 곳에서 야영을 해 씻지도 못했기에 야스 역에서 전철로 네 정거장 떨어진 곳에 호텔 온천이 있다고 해 가보기로 했다. 마침 28번 사찰 다이 이치지 (大日寺) 가는 길이기도 해  들러보니 10시부터 문을 연다고 했다. 호텔 객실은 일박에 5240엔, 체크인은 오후 2시부터라고 했다. 호텔 앞 지역농산물 판매장 앞에 순례자들이  발을 담글 수 있는 무료 족욕장이 있었지만 이곳 역시 닫혀 있었다.


28번 다이이치지 (大日寺)는 고난시(香南市) 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55번 국도에서 내륙 쪽으로  4,5km쯤 올라간 지점에 있었다. 등교하는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무리 지어 달리고 있다. 남녀 불문 대개들 교복에 흰 헬멧을 쓰고 씩씩하게들 달린다. 실제는 어떤지 몰라도 아이들은 대개 유쾌하고 건강해 보인다. 

본당 앞에 향을 사르고 참배를 하며 나를 이 순례길로 나서게 한 친구 W를 떠올렸다. 자본에 속박되지 않는 '주인된 삶'을 살겠다며 귀농한 거창군에 아내와 다섯 살 배기 늦둥이와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남겨두고 짧은 생을 마쳤다. 학생운동을 할 때도, 안산에서 공장에 다닐 때도 그는 망설임과 우회를 몰랐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변혁'은 낡은 추상이 되었다. 강직하고 비타협적인 그의 태도는 셈 빠른 사람들에게 종종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후배들에게도 그는 어느 순간 부담스러운 선배가 되어 있었다. 양심을 속인 적 없고 이타적인 일에만 정열을 쏟았지만 삶은 늘 정당한 보상을 돌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그 자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의 순간들, 그 충일한 마음 자체가 보상일 수 있겠다. 



28번 다이이치지에서 29번고쿠분지(国分寺)까지는 6km가량 떨어져 있다. 모내기를 마친 드넓은 들판과 마을 지나면서 조금씩 기분이 나아졌다. 하늘은 여전히 잔뜩 찌푸려있다. 가끔 만나는 도보순례자(아루키 헨로 步き遍路)들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십이삼 일 이상 걸었기에 대개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중 서산묘원이라는 공동묘지 옆에  허름한 젠콘야도(善根宿)가 있었다. 다다미 두 장과 소파와 화장실. 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가 잠시 앉아서 쉬었다. 어제 밤처럼 비바람 몰아치는 날, 도보 순례자들에게 이런 공간은 얼마나 위안이 될까. 벽에는 순례자들에게 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살생을 하지 말 것. 음란한 마음을 갖지 말 것. 이간질을 하지 말 것. 화를 내지 말라는 말들.  그 중  순례자 매너에 대한 글은 인상적이었다. 오세타이(お接待)는 수행을 전제로 한 것이니 신세를 지지 말라는 말(迷惑を掛けるな). 도중에 순례복장을 하고 절 앞에서 탁발을 하던 이들이 떠올랐다. 더러 '생계형(?)' 순례자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남에게 신세지지 말라는 말은, 일제 치하에 어린시절 일본에서 성장한 부모님께 늘 듣던 이야기였다.  
 

순례자들이 남겨둔 기록 중에 ‘올해도 시코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1년에 한 번 입원합니다.’라는 말이 눈에 띄었다. 내게도 일 년에 서너 번 찾아가는 지리산이나 설악산. 매주 한 번은 걷게 되는 집 근처 북한산이  병원이었구나 싶었다.

다시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29번 고쿠분지(国分寺)까지는 들판과 마을을 가로지르는 평탄한 길이었다. 고쿠분지는 인왕문부터 삼나무들이 곧게 뻗어있어 꽤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그 절에서 떠올린 사람은 우리 6남매의 맏이던 큰형이다. 장손이라는 이유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형에게 그 운명은 버거웠다. 부산에서 성장하다 사춘기를 갓 넘길 무렵 아버님 사업이 망해  서울에 올라온 뒤로 달라진 가정 형편도 타향살이도 형에게는 힘겨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에도 변변한 직업을 갖는데도 실패해 늘 집안 어른들로부터 면박을 당해야 했다.
 
형은 신혼시절인 1981년 처가가 있던 부산에 다녀오다가 '경산 열차사고'를 당했다. 50여 명이 사망하고 사상자가 수백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고였다. 추돌당한 통일호 열차 맨 마지막 칸에 타고 있다가 열차가 튕겨져 나갔고 형이  벗어둔 양복 재킷이 사망자 옆에 떨어지는 바람에 형님 내외는 뉴스 속보에서 사망자로 발표되었다. 어머니가 실신을 하고 가족들이 절망에 휩싸였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새벽녘 부산에서 올라가 현장을 확인하던 삼촌이 두 사람이 부상은 당했지만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사고를 겪은 뒤 형수는 뱃속에 있던 조카를 출산했고 얼마 뒤 부산으로 이주한 형님 부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직장 생활을 성실하게 이어가며  아이들을 반듯하게 길러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년퇴직을 하고 조카들이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게 된 무렵 허망하게도 뇌종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큰 형을  추모하며 향을 살랐다. 속  깊은 어른으로 잘 자란 조카들이 있으니 미련은 접어두시고 편안한 마음로 안식을 누리시기를.  


고쿠분지를 나설 때부터 빗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고어텍스 재킷을 꺼내 입고 뺨을 때리는 빗방울을 견디면서 달렸다. 30번 센라쿠지(善楽寺)까지는 서쪽으로 들판과 산기슭으로 순례길이 이어져 있다. 빗줄기가 너무 거세져 길가에 있는 민가의 차고 겸 농기구 보관소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었다. 한 30분쯤 망연자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소형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려다가 나를 보고는 그냥 편히 있으라며 집 안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뒤 따라 들어오던  할아버지도 안심하라는 손짓을 하고 뒤따라 들어갔다. 이런 것도 이른바 '신세를 진' 것일까?
 

빗줄기가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 다시 길을 나섰다. 얼마쯤 달리다가 다시 비가 거세져  작은 언덕 위 공장 축대 아래 비를 가릴 수 있는 휴식소에서 또 쉬었다.  벽에 오려서 붙여둔 신문기사에 이 공장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운영하는 휴게소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었다. 간식이 들어 있다고 쓰인 통도 열어보았지만 비어 있었다. 충전을 할 수 있는 콘센트 달린 전선이 하나 연결돼 있었다. 문득 비에 젖은 다리를 내려다 보니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자전거를 멈출 때 관성 때문에 출렁이는 자전거 패달이 다리에 상처를 낸 것이다. 비를 피하고 있던  두 도보 순례자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분은 66번 사찰에서부터 시작해 거꾸로 돌고 있는데 22일 째라는데 다리를 많이 절었다. 또 한 분은 고야산이 있는 와카야마(和歌山)에서 와  6일째 걷고 있다고 했다. 이 사람은 틈이 날 때마다 구간을 끊어서 걷고 있다고 했다. 이 분은 복장도 순례자들의 정장이랄 수 있는 상하의를 제대로 갖춰 입었고 인상도 여간 강직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마냥 앉아 기다릴 수 없어 비를 맞으며 길을 나섰다. 헨로 스티커를 보고 따라가다보니 이번에도 경사가 심한 공동묘지를 안쪽 길로 통과하게 돼 있었다.  30번 센라쿠지(善楽寺)는 이 묘지 아래 있었다. 비를 피하고 머뭇거리다 보니 정오가 다 됐다 30번 절이라 납경도 받았다. 비를 너무 맞아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어느 새 고치시(高知市)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센라쿠지 인근에 대형 할인점이 보이길래 들어가 옷도 말릴 겸 점심을 시켜 먹었다.'오늘의 점심' 우동덴뿌라정식. 500엔. 길가에 서 있는 작은 전차를 무심코 지나려다 보니 '헌법 9조 호'라고 쓰여있다. 반가웠다. 일본의 우경화는 인접국가들에 위협을 준다. 2차 대전 전범국인 일본은 군대의 보유와 교전 권한을 포기를 명시한 이른바 '평화헌법'을 제정했는데 무장과 전쟁 수행이 가능하도록 헌법 9조를 바꾸겠다고 아베와 같은 우익들이 선동하고 있었다. 20년 넘게 경기침체를 겪은 일본 국민들도 힘센 일본 재건을 내건 자민당을 지지하는 분위기다. 짐작컨대 이 전차를 운행하는 노조가 헌법 9조를 지키자고 주장하는 진보적인 노조가 평화헌법 수호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일본을 여행하는 동안 일본 사람들로부터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북이 대기권을 벗어나는 은하수 3호를 발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북한의 위협을 조금 과장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재무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기타 조센(北朝鮮)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남북이 지금 같은 대립 상태를 끝내고 서로 사이좋게 오고 가며
평화롭게 지내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런 대답을 듣는 일본 사람들의 표정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그들은 뭔가 화끈하게 호전으로 북한을 규탄하는 말을 해주기를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도 비는 더 거세졌다.  31번 치쿠린지(竹林寺)까지는 직선거리 8.4km.  길도 시내로 평탄하게 이어져 있는 것 같아 일단 달릴 수 있는데까지 가본 뒤  잠자리를 고민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방수팩 안에 넣어둔 핸드폰 GPS 신호를 확인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지쿠린지(竹林寺) 주변 도로들은 길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아 무시무시한 터널을 두 번이나 오락가락 한 뒤에도 폭우가 쏟아지는 강변을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 산 위로 올라가는 진입로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오후 4시가 지나면서는 점점 초조해졌다. 침착하자. 다짐을 하고 헨로미찌 스티커를 보았던 시내 쪽으로 다시 돌아가 일단  차근차근 길을 찾아 가기로 했다. 폭우 속에 초조한 마음으로  좁은 골목길을 꺾어 드는 순간 자전거가 미끄러지면서 어이없게도 노변 배수로로 추락했다. 떨어지면서 가슴을 부딪쳤는데 잠깐 숨이 멎는 것 같은 아팠고 가슴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다.

제기랄. 운행을 못 할 정도로 부상을 입었을까? 그 잠시 허리를 굽히고 숨을 고른 뒤 몸을 좌우로 틀어보았다. 다행히 움직일 수 있었다. 자전거를 다시 세우고 큰 고장이 없는지 살핀 뒤 오던 길을 뒤돌아 자전거를 끌며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운행이고 뭐고 일단 안전한 대피소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평화헌법을 지키자는 약속? '헌법9조호' 전차

다행히 도사지(土佐路)  비즈니스호텔을 발견했다. 빈 방도 있었다. 일박에 4천300엔. 저렴하기까지 했다. 아침도 준다고 했다. 시설은 낡았지만 깨끗했다.  패니어를 모두 풀어 방으로 옮기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어제 저녁 공동묘지 위 야영장에서 구워 먹으려다 그냥 가방 속에 가지고 생 돼지고기가 그대로 가방 안에 있었다. 도시락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찬밥들도 고민이었다. 호텔에서 조리를 어려울 테니 커피포트에 끓인 물로 살짝 데쳐서 도시락에 챙겨두었다. 저녁때까지 쉬면서 몸을 추스르고 인근에 있는 할인점에 가서 장을 봐가지고 들어왔다. 캔맥주 500cc (283엔) 즉석카레 (88엔) 우유 (138엔) 모리나가 캐러멜(158) 쵸코 쿠키 (99엔)  등을 샀다. 즉석 카레를 데워 찬밥에 부어 저녁을 먹고 온탕에서 한참 동안 몸을 데운 뒤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창 밖에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이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빨래를 해서 방안에 줄을 매고 널어 말렸다. 내일 아침. 어떻게 될 것인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  일단 잠을 자기로 했다.
 

#8 고난시(香南市)  야시파크 해변~ 고치시 도사지(土佐路) 호텔

 주행거리:  35.92 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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