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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May 10. 2019

제발 눈 좀 낮추라구요?


 "아직 결혼을 안하신 걸 보니 눈이 엄청 높은신가봐요."

 "제발 눈 좀 낮춰, 응? 그래서 평생 독거 노인으로 살려고?"


 '눈 좀 낮추라'는 그 말, 거짓말 쬐끔 보태서 한번만 더 들으면 500번이다. 처음에는 속으로 '내가 그만큼 괜찮아 보인다는 말이겠지'라며 미소를 띈 얼굴로 '아닙니다. 저는 눈이 절대 높지 않아요'라며 손사레를 치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때론 "제가 키가 좀 크다 보니 눈이 높겠죠?"라는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받아치던 순진한 시절도 지났다.


 사실 실제로 눈이 높지 않을 뿐더러(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그 '눈'이라는 말이 뜻하는 상대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이 자주 반복되고 같은 반응을 할 때마다, 속으로 같은 생각이 들곤했다. "아놔. 얼굴에 '나, 눈 안높음'이라고 써붙일 수도 없고, 녹음기를 틀어놓을 수도 없고."

 

 하지만 해가 갈수록 '눈이 엄청 높아보이세요', '눈 좀 낮춰'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누군가에게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의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불쑥 '결혼하셨어요?'라고 물었다가 머쓱해질 때 분위기를 무마시킬 때 의례적으로 말이기도 했다.

 

 말하는 사람의 어투에 따라서는 '네 주제를 좀 알아라. 그렇게 눈만 높아서 어떡할래?'라는 비아냥처럼 들리기도 하고, 어떨때는 "지금이야 모르지만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는 어떡하려고. 대책없이"라는 측은지심의 발로로 느껴지기도 한다.


 희원씨는 '700번 선 본 여자'다. "23세부터 '선시장'에 뛰어들었고 중매, 소개팅 다 합쳐서 700번 정도 만남을 가진 것 같아요. 제가 꼭 미남만 찾는 것은 아닌데, 그동안 마음에 드는 인연을 만나지 못한 것 같아요. 물론 한두명은 마음에 들어서 제가 적극적으로 대시해 사귄적도 있지만, 지금은 혼자네요."

 

 희원씨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마음에 안 들어도 눈 딱 감고 3번만 만나보라"는 말이었다.

 "저의 경우는 첫날 마음에 들지 않으면 5번을 만나도 생각이 바뀌지 않더라구요. 억지로 참고 만난 적도 있는데, 이성적인 감정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데 계속 만남을 지속할 수 없잖아요. 그건 상대방에게도 실례인 것 같고."

 

 '결혼을 안하는 것은 불효'라며 머리를 싸매고 누운 엄마가 분가를 종용해 결국 집을 나왔지만, 희원씨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엄마에게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은 안해될만큼 부자'라면서 소개를 받은 그 남자. 말도 잘 통하지 않고 공통 관심사도 없는데 오로지 결혼에 목적성을 두다 보니 관계가 좀처럼 진전되기가 싶지 않다.

 

"대화도 안되고 서로에 대해서 아는게 없는데 한 이불을 덮고 자야 된다니, 아무리 결혼이 급해도 이건 아니잖아."

 

 결국 파토가 간 그날, 희원씨는 한여름 소나기처럼 엄마의 잔소리가 지나간 뒤 머리가 하얘졌다.


 "애가 세상물정도 모르고, 당최 약지를 못해서. 옛날에는 얼굴 한번 안보고도 그냥 결혼했어. 결혼도 비즈니스라는 말 몰라?  넌 왜 그걸 못하니. 에휴. 그렇게 눈이 높아서 대체 어디에 쓰려고. 아무나 혼자 사는 줄 알어? 혼자 살 위인도 못되면서"

 

 희원씨도 속이 상한다. 주변에 결혼한 언니들은 "경제력이 제일"이라며 눈 딱감고 결혼하라지만,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억지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건 옷을 쇼핑하거나 여행지를 고르는 아닌,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찾는 일인데.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의기소침해진 희원씨는 이젠 주변에서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렇게 눈이 높아서 없는 거예요."라는 상처 아닌 상처같은 말로 돌아올 것 같아서다.

 

 사실 희원씨가 눈이 높은 것은 아니다. 만남의 자리에서 호감의 화살표는 엇갈렸다. 더도 덜도 말고 반반씩, 서로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 뿐인데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녀가 허황되게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왕자님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감정의 교류가 가능하고 진심으로 믿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진실된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 뿐인데. 그것이 '눈이 높다'는 한가지 말로 치환된다니 억울한 노릇이다. 그런 그녀에게 또다른 지인은 "눈을 절대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고 조용히 충고한다. 혼란스럽다.

 

 사실 외모로만 따지자면, 오늘만해도 수많은 이상형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어느 영화나 드라마처럼 미혼자들끼리 서로 호감도를 표시하는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말이야. 밀당이나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이" 옆에서 듣던 친구는 황당한 소리라며 혀를 끌끌 찬다.

 

 어느 날 마스다 미리의 책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를 보다가 네컷짜리 만화를 보고 눈이 번쩍 뜨인 적이 있다. 결혼의 압박에 시달리던 주인공 수짱은 이렇게 말한다.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려면/이상만 쫓아서는 안된다고 말들 하지만/인간이 이상없이 행동해도 되는거야?/그건 동물이잖아."

 

 그래, 꿈이 없는 인생은 너무 슬픈 일이다. 행복을 쫓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권리니까 너무 의기소침하거나 위축되지 말자. 한동안 '인생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한다'는 말에 꽂힌 적이 있다.


 삶은 자신의 능동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 길이고, 사람은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사는 거니까. 필요하다면 이상을 수정할 수는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을 일구고 싶다는 희망마저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녀는 만약 오늘도 누군가 같은 질문을 해온다면, 활짝 웃으며 이렇게 답해줄 예정이다.


 "맞아요. 저 눈이 좀 높아요. 그것도 많이.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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