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으로 프랑스 유학 갈 생각인데요.

퇴사 후, 와인을 공부해 WSET Level 3를 땄다.

by 편린

“대체 뭘 하고 싶어서 퇴사하는 건데?”

“저는 그냥... 와인이 좋아서, 와인으로 유학 갈 생각인데요.”


좋아하는 일을 찾겠다고 아무런 대비 태세도 없이 맨발로 회사 밖을 나선지도 어느새 1년이다. 이제는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 나는 아직도 진로 찾기에 여념이 없다. 누구는 평생을 살아도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던데,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 확실히 찾을 수는 있는 건가. 8살 때부터 쭉 드라마 덕질을 해오다가, 대학에 와서 드라마를 만드는 일을 배웠고, 결국 드라마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일상에서 내가 좋아하던 것을 업으로 만들었던 전력이 있으니, 이번에도 그래 볼까 싶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사직서를 던지고 넓은 세상으로 나오던 작년 9월 무렵 때마침 내가 가장 열렬히 좇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와인이었다.


처음 와인을 접했던 건, 2019년도 겨울 오리건주 유진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네 펍에서 마셨던 레몬 색 샤르도네였다. 처음으로 사귄 외국인 친구가 Chardonnay 한 잔을 주문하길래 나도 같은 걸로 따라 주문했었는데, 사실 샤르도네라고 하는지 샤도네이라고 하는지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름조차 굉장히 낯설었던 그 첫 잔은 놀라울 정도로 상큼했다. 상큼하기만 했던가. 고급스러운 오크 향이 상큼함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어서, 그날로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복합적인 풍미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였다. 어떻게 하나의 액체에서 시간 차로 다른 맛이 나고, 여러 가지 과일 향이 겹겹이 풍길 수가 있는지. 오묘하고도 신기했다.


그렇게 와인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시기에 나는 운이 좋게도 유명 와인 산지를 끼고 있는 미서부에 거주하고 있었고, 덕분에 주말마다 Saturday Market에 나가 소규모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내추럴 와인을 한 병씩 사들여 마셔볼 수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칼에 푸근한 인상을 지닌 아저씨들이 정겹게 설명해 주시는 와인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 시절의 낙이었다. 가끔씩 마실이 필요할 때면, 우버를 타고 근교 와이너리에 방문해 광활한 포도밭이 내려다보이는 선배드에 누워 와인을 시음하곤 했다. 티끌 하나 없이 선명한 하늘 아래 널따랗게 펼쳐진 잎들을 바라보며 마시는 와인이 참 달았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이나 와인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없이 혀의 감각에만 의존하며 아끼는 사람들과 대략 100병이 넘는 와인을 나눠마셨다.


한참을 그렇게 마시다 보니 새로운 재능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후각이 남들보다 뛰어난 편이라 와인의 향을 더 섬세히 살필 수 있었다는 것. 그 감각을 살려 와인의 다층적인 면면들을 더 깊이 있게 알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그리하여 퇴사 후 가장 먼저 실행한 것은 퇴직금의 큰 비율을 뚝 하고 떼갈 만큼 값비싼 와인 학원에 등록한 것.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국제 와인 전문가 자격증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듣고, 오랜만에 공부 욕구가 근질거렸다. 그 길로 몇 달간 시음과 수업, 독학을 반복한 끝에 Pass with Merit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WSET 시험에 거뜬히 통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이 와인이라는 걸 가지고 한번 프랑스로 유학이라도 한번 가볼 작정이었으나, 지금은 여러 갈림길을 따라 걸어오는 과정 속에서 또 그와는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사부작사부작 익혔던 이 와인 지식이 언젠가 내가 만드는 모임이나 내가 만드는 책에서 작게나마 빛을 발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도, 하고자 하는 것도 끊임없이 바뀌는 변덕스러운 나지만, 이리저리 탐색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덕에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나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쌓여 어디로 증발해버린다기보다 늘 언젠가 쓰임새를 발휘한다는 단단한 믿음이 있다. 한 병의 와인이 만들어지기까지 가지치기부터 포도나무 트레이닝, 베레종, 수확, 발효, 정제, 숙성, 블렌딩까지 수없이 많은 과정을 거쳐 가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와인이 내 인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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