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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ageulp Mar 21. 2023

17년 만에 초보레인 탈출

새벽수영 일기를 시작합니다

새벽수영 일기를 시작합니다.


Intro

 20살 대학생이 된 방학 첫 날 수영을 배워 보겠다고 대학교 내 운영하는 수영장 센터에 가서 호기롭게 홀로 등록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수영장에 발을 내딛은지 일주일 후 더 이상 수영장에 나가지 않았다.

공감을 할 수도, 할 수 없을 수도 있을텐데 수영을 그만 둔 이유는 바로 내가 '하비(=하체비만)'였기 때문이었다. 자존감이 낮았던 20살의 나는 수영복 입은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Y자 수영복이 내 몸매를 이렇게나 적날하게 보여주는지 미처 알지 못했었다. 그 당시 반전신 수영복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을 때여서 맨 살을 좀 더 가려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내가 등록한 초급강습반에는 얼굴만큼 몸매도 예쁜 여자 회원 두 명이 친구로 같이 등록을 했었고 첫 날부터 나의 신경은 온통 그녀들과 비교하느라 수영의 목적성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수영강사 마저 다른 회원들과 나를 차별한다고 느끼면서 초스피드로 수영의 흥미를 잃고 더 이상 수영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주변의 모든 것에 예민하고, 자존감은 좀 많이 낮았던 20살의 대학생이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다는 사실을 지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째든 그렇게 조용히 수영장을 떠나고 나서 다시 수영을 시작한 것은 임신을 하고 난 10년 만이었다.


 신혼과 임신을 동시에 시작한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오로지 임산부 역할만을 영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진 좋은 시절이 있었다. 일을 그만두자 마자 나는 많은 임산부들이 택하는 정형화 된 태교 활동보다는 평소에 잦은 야근으로 제대로 하지 못한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임신 중에도 괜찮은 운동을 찾던 와중 10년을 잊고 지냈던 수영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이다.

수영은 임산부에게 좋은 운동 중 하나이다. 물에서는 체중에 부하가 가지 않기 때문에 배가 불러와도 몸에 무리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전신운동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하비'로 창피해 하던 20살의 대학생이 아닌 30대의 예비 아줌마는 망설일 이유없이 곧바로 수영등록을 하러 갔다.

 임신 중 수영은 4개월 간 이어져 갔다. 임신 중이였음에도 기본적인 영법을 배우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기 때문에 초급 강습반에서 접영을 제외한 자유형, 배영, 평영의 영법을 배울 수 있었다. 점점 배가 불러오면서 임신 중에 수영이 괜찮은지 회원들이 하나 둘 묻기 시작했고 다들 임산부 회원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임산부 교실이 따로 없던 스포츠센터에서 임산부 회원은 4개월 동안 오직 나 혼자였다. 수영이 좋은 건 알지만 생각처럼 쉽게 용기내어 수영하는 임산부는 많지 않은 거 같았다. 불러오는 배를 보는 것이 힘들었던 회원 한 분이 이제 집에서 좀 쉬라고 할 때쯤 출산 예정일 5일을 앞 두고 수영강습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수영강습을 그만 둔 3일 뒤 무사히 자연출산을 했다.


 수영장을 다시 찾은 건 모유수유를 완전히 끝내고 난 1년 뒤였다. 여전히 수영은 출산과 육아로 엉망이 된 나의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데 좋은 운동이었지만 이제 돌을 막 지난 아이를 때어 놓고 수영장을 갈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그래도 신랑이 회사를 마치고 돌아와 아이를 맡아 주는 시간을 활용해 수영강습을 다시 받기로 했다. 하지만 신랑이 회식을 하는 날이나 잠들지 않는 아이가 엄마를 찾기 시작하면 그 날은 수영장을 갈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한 달에 수영장을 갈 수 있는 날이 너무 적었기에 몇 달이 지나도 초급 강습반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돌아오는 1일이 되면 도돌이표가 되어 새로 들어온 회원들과 처음인 것처럼 매번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보는 회원들에게는 왠지 모르게 좀 잘하는 초급반 회원으로 몇 달을 보내다 결국 저녁수영을 새벽수영으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새벽수영으로 바꾼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전 날 일찍만 잠든다면 저녁시간보다 수영장을 빠지는 날이 훨씬 적었다. 또한 타인에 의한 변수가 아니였기에 그 만큼 수영을 못갔다는 스트레스도 덜 받았다. 하지만 새벽수영에서 초급 강습을 다시 받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로 또 다시 수영장을 갈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2년 만에 수영장이 개장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웠던 연인을 다시 만난다는 기분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수영 등록을 했다. 이제는 두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나면 빈 시간에 수영장을 갈 수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예측불허한 날들이 많기에 새벽만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새벽수영만의 개운함을 이미 알고 있지 않는가. 새벽수영의 초급 강습반을 그렇게 다시 시작했다.

수영장의 분위기도 두렸웠던 시기를 지나 다시 활기를 찾는 사이 어쩐지 너무 잘하는 초급 강습반 회원이었던 나는 이제서야 접영까지 영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끝 초급레인에서 중급으로 점프하는 날이 17년 만에 드디어 나에게도 오게 된 것이다.

수영장에서 아주 수줍은 회원인 나는 얼마나 기다렸던 진급인지를 드러내진 못했지만 뿌뜻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초급레인에서 중급레인이 이토록 멀고도 먼 길이 였던 걸까? 분명 조금만 꾸준히 했더라면 금방 이룰 수 있었던 단계였을건데 말이다. 어쩌면 예민하고 자존감 낮던 20살의 대학생은 사실 용기와 끈기가 부족했던 건아니였을까? 17년 만에 초보레일 탈출은 17년 만에 드디어 무언가를 꾸준히 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즘도 나는 꾸준히 새벽수영을 가고 있다. 매일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새벽수영의 하루들이 또 다른 꾸준함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새벽수영의 기록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인스타그램 | @su0break

글 | 라라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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