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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May 15. 2020

설마 회사에서 자아실현하려는 건 아니지?

| 퇴근 후 시간으로 자아실현할 수 있을까?




퇴근 후, 내 삶을 꿈꾸던 때가 있었다.


출근은 매일 같은 시간이었지만 퇴근은 매일 달랐다. 사무실에서는 일에 치였다. 새벽에 일어나 눈곱을 떼면 출근하기 바빴다. 사무실에서는 고성이 오가며 서로의 의견이 바쁘게 충돌했다. 화장실에서 코 고는 소리가 자주 들렸고, 사람들은 피곤에 취해갔다. 하지만 회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욕을 먹어도 연말에 있을 두둑한 주머니를 생각하며 인내하던 시절이었다. 한 달에 3일 정도 쉬었던 것 같다. 리더들은 자신의 책상 옆에 라꾸라꾸 침대를 놓고 자는 것을 무용담처럼 자랑스러워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세계 1위 회사를 만들고 있는데 일조한다는 생각에 더욱 치열하게 나사를 조여댔다. 그땐 그랬다.

이런 와중에도 일을 하는 사람과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일을 받은 사람들은 계속 일이 쌓였고, 일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푸념으로 시간을 보냈다. 일이 많은 사람들은 점점 실력이 늘었다. 다크서클도 함께 늘어갔다. 나 역시 약간은 이쪽에 한 발정도 담그고 있을 때다.

밤 10시쯤 일이 끝나면 회식을 했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술자리에서는 모두 하나라고 외쳤다. 그리고 모두 술 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2시를 훌쩍 넘겨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쓰러졌다. 그래도 다음날 지각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그때 우리들은 피와 살을 태워가며 일했다.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 일을 왜 하는지 모르던 때였다. 그냥 시키는 일을 치워내기 바빴다. 그들은 생각을 했고 나는 몸을 써서 실행했다. 




그 시기 목표는 퇴사였다. 

회사를 관둘 수 있는 용기와 재력이 내가 갖춰야 할 최종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난 퇴근 후의 자기 계발을 통한 퇴사를 꿈꿨다. 당시 나는 파릇파릇한 사원이었다. 가끔 후배들과 차라도 마실 때면 마치 커다란 계획이 있는 것 마냥 거들먹거리며 말하곤 했다.


“너희들 설마 회사에서 자아실현하려는 건 아니지?”


이 말을 들었던 후배들이 지금 내 옆에서 같이 일하고 있다. 우린 이렇게 여전히 같은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회사를 벗어나야 온전한 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의 일 대부분이 그랬다.


직장인이 되면 맵시 나는 정장을 입고, 멋진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매고, 반짝반짝 윤이나는 구두를 신고 사무실에 앉아 머리로 고민하고 두 손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기획해서 찬란한 성과를 만드는 일을 할 줄 알았다. 처음 부서에 배치받았을 때 선배 말이 정장을 입지 말라고 했다. 편한 청바지를 입으라고 했고 운동화를 신고 다녀도 된다고 했다. 그래도 신입사원이라 몇 번 정장을 입고 출근했는데, 지도선배가 무슨 행사가 있냐며 일찍 퇴근하려고 정장 입고 왔냐고 물어봤다. 그땐 그랬다.


“일 = 구속”이라고 생각했다. 이 속박을 벗어나야지만 자유와 함께 자아를 실현할 비옥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 심하면 심할수록 역설적으로 현재가 더욱 비참해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단단했던 내 관념을 부순 것은 정말 별것 아닌 상황이었다.




매일 인내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의 시간은 인생에서 버려버리고, 퇴근 후 시간, 상대적으로 짧지만 이 시간에 최대 효율을 내서 자기 계발하는 것에 집중했다. 열심히 계획을 짰고 실천을 시도했지만 기대만큼 잘 되지 않았다. 눈꺼풀은 너무 무거웠다. 다음날 새벽 눈뜨면 어제 계획을 지키지 못한 나를 채근했다. 매일 같은 길을 운전해 출근하면서 혼자 차 안에서 이런 내 모습에 좌절해 악다구니를 쏟아냈다. 뇌를 거치지 않은 말들이 매일 마구마구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던 어느 날 나는 이 수많은 욕들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불만이 얼마나 많은지 기록해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출근과 동시에 피씨를 켜고 메모장을 열어 내 안에 가득했던 불만을 미친 듯 적어나갔다. 그런데 엄청난 양을 쏟아낼 줄 알았던 내 불만은 이상하게도 10줄이 채 되지 않았다. ‘또 뭐가 있었더라...’라는 생각만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그렇다. 매일 똑같은 불만의 굴레 속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굴레의 저변에는 “회사는 구속”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불평 거리들은 몇 줄 되지 못했고, 적고 보니 “왜?” 와 “어떻게 하면?”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화가 치밀어 오를 때는 잠시 멈춰 그 화를 써보는 것이 필요하다. 직접 손으로 써보지 않고서는 화의 본질을 알아채기 힘들다. 머릿속에서 폭발하듯 계속 새로운 화가 일어나는 것 같지만, 글자로 남겨진 문장은 단순하다. 그리고 쓰인 글자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준다.


화를 쓰게 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갑갑하기만 했던 것을 말이 아닌 손으로 써보면서 해결책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회사 일에 대한 불평불만의 이유를 “내 문제”로 규정했다.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비단 인내만이 정답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일을 대하는 태도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난 일에 대해 제대로 노력해보지 않았고, 선배들의 생각 안에서 움직이는 시킨 일을 잘하는 그 정도의 존재였다. 그 틀을 깨어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강점과 약점을 분석했다. 물론 생각을 종이에 기록하면서 말이다.




자기 계발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자기 계발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뻔한 말, 아무 말 대잔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여느 주말과 비슷하게 서점에 들러 매대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눈길이 가지 않던 [자기 계발] 코너의 책 제목들이 시선을 끌었다. “시간관리”, “자기 혁명”, “생존전략” 이런 큼지막한 문구들이 나를 자극했다. 나는 몇 권을 구매해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뻔한 말이었지만 뻔한 이유가 원리원칙이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책을 읽고 회사 업무에 자기 계발서에서 알려준 몇 가지 방법을 도입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면, 메일을 쓸 때 습관적으로 답장이나 전달을 눌러 RE:RE:RE___ 방식으로 꼬리를 물어 회신하는 것이 아니라, [홍길동 님] : ___ 과 같이 메일 제목에 수신자를 기록하여 명확히 담당자를 지정하고 의견을 전달해보았다. 또,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던 맞춤법 체크를 진행했다. 사소한 것들이지만 하는 일에 조금씩 정성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잘하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특히 소질이 있던 엑셀 프로그램을 좀 더 세련되게 사용하기 위해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고수들의 방법을 배웠다. 또 암기력을 활용해 남들이 보고 읽던 숫자들을 외워서 말했다.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는 않았지만 하고 싶었고 그래서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돌아오는 피드백이 그 일을 더 잘하게 만들었다.




15년이 훌쩍 지났다.
지금도 나는 회사에서 일을 한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일은 회사의 이익을 위한 노력이 5할, 성장을 위한 노력 5 할이다. 회사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과정이 내 능력에 피와 살이 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오래된 자기 계발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나의 시간 활용력을 놀라워한다. 그런데 이건 모두 회사에서 배운 것이다. 회사에서 시간 단위를 1시간에서 15분 단위로 쪼개어 계획하는 것을 배웠고 습관화했다.

요즘도 일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많이 깨닫는다. 오늘 아침 팀장과의 미팅에서도 한 가지를 깨우쳤다.


어제 퇴근 전, 팀장께서 "지난주  경태 프로가 만든 자료를 현재 상급부서에서 리뷰 중인데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보세요."라고 하셨다.

나는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고 우리 팀 자료는 수정이 없다고 확인해서 그렇게 말씀드렸다.

오늘 아침 미팅 때 이 건을 다시 물어보셨는데, “우리 팀 자료는 수정된 게 없다고 했는데, 다른 팀 자료는 어떤 부분이 수정되었는지 확인해봤니?”였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우리 팀 자료의 수정 여부가 중요했던 것이고, 팀장은 경영자 입장에서 전체 자료의 방향이 어떻게 수정되었는지가 중요했던 것이다. 난 다이어리에 붉은색으로 썼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넓게 바라볼 줄 아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별것 아닌 것으로 넘길 수도 있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이 축적되어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을 일이라고 생각하면 일이 되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일상이 된다. 어떤 사람은 은행에 들러 통장을 개설하는 게 일이고, 누구에게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난 점점 일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회사의 일과 집에 가서 하는 일상 모두가 점점 하나가 되어간다. 일과 삶을 확연히 분리해서 살았던 예전보다 중간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이 훨씬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은 아마도 스스로 일을 적극적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래전 후배에게 "설마 회사에서 자아실현하려는 건 아니지?"라며 거들먹거리던 그 순간이 너무나 부끄럽다. 내일 옆자리 후배에게 가서 말해야겠다. "회사에서 함께 자아실현 하자!"라고 말이다.


#회사생활 #월급쟁이 #자아실현 #자기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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