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있던 기남에게 전화가 왔다.
일전에 한 번 인터뷰했던 기자였다.
<대표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아, 네. 잘 지내시죠?>
<대표님!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요.>
<??>
<엊그제 있었던 성주대교 붕괴 사고 때 말이죠.>
<...>
<현장에 계셨던 게 맞나 해서요. 맞나요?>
기남은 뭐라 답변을 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됐다.
솔직하게 말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그랬다.
기남은 늘 그랬듯 정공법을 따르기로 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원래 그렇게 일찍 출근하세요? 아주 이른 시간이었는데.>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궁금하신 게 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
<??>
<대표님 회사 방향은 그쪽이 아니지 않나요?>
<...>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 말에 의하면 굳이 경찰 승합차 뒤를 따라가시려고 했다던데... 그 이유가...>
<그건 제가 좀 빨리 가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 같습니다.>
<네... 그러시군요.>
<저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전 이만 일이 있어서요.>
<아. 네.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고, 다음에 또 연락 주겠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기남은 좀 의아했다.
얼마 후 이번엔 박흥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남아, 좀 진정됐냐? 제수씨도?>
<응. 이제 괜찮아.>
<다행이다. 그런데 말이야. 예상했던 대로 위에서 왜 경찰차 두 대를 요구했었느냐고 묻더라.>
<뭐라고 했어?>
<내 각본대로 아버지 꿈꿨다고 했지.>
<그걸 믿어?>
<안 믿는 눈치긴 한데, 어쩔 거야 지들이! 흐흐.>
<버스 사고 막은 걸 안 거야 그럼?>
<그럼! 바로 뒤에 있던 버스가 브레이크 밟아 수많은 생명을 구했는데!>
<잘 넘어가 다행이다!>
<잘 넘어간 정도가 아니라 캬아하! 포상한단다.>
<포상?>
<응. 대형 사고 막았으니까. 너 말에 의하면 30명 넘게 사망했다며. 내가 그랬지. 아버지가 많은 희생자가 난다고 했다고. 그런데 거기에 비하면 3명만 사망했으니까.>
<형 말을 다 믿은 거네. 하긴 바로 뒤에 버스가 있긴 했으니까.>
<근데 내가 상을 받는 건 정말 아닌 거 같아서 말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시킨 일이잖아. 이거!>
<형이 한 말 잊었어? 몇 번 생을 반복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 어떻게 하냐던 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찝찝해서 영.>
<형이 애쓴 게 맞잖아. 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 말고>
<암튼 난 너한테 신세 진 게 너무 많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 같은 예감이 든다. 어째.>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하지 말자, 형! 응?>
<참! 사고 난 날 새벽에 거길 지나갔던 차량 운전자가 서울시에 신고까지 했었대.
그런데도 그냥 넘긴 거야. 분명, 이 사고로 옷 벗는 사람 있을 거다.>
<그랬구나! 난 그것까진 기억이 안 나네. 그런데 옷 벗는 게 중요한 건 아니지. 이런 참사가 다시 또 일어나지 않으려면 안전불감증을 없애야 하는 게 맞아.>
<안전불감증? 좋은 단언데!>
<이 사고로 법도 다시 제정되겠지.>
<그러겠지. 알았어. 조만간 가족 다 모여서 밥 한번 먹자!>
<그래. 그러자 형!>
통화를 마친 기남은 연주에게 전화했다.
<몸 좀 어때?>
<괜찮아. 몸도 마음도 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그렇다니까. 내 걱정 말고 일에 집중해. 요즘 일에 너무 소홀했잖아. 해야 할 일 하느라고.>
<알았어. 그럼 나 일하고 퇴근하면서 들를게.>
<됐어. 안 와도 돼. 어제도 왔잖아.>
<아냐.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해 봐. 다 사 갈 테니까.>
<됐다니까. 어머니께서 많이 사다 주셨어.>
<퇴원은 언제라고 했지?>
<내일 하려고. 다 나았고, 집에 가고 싶어.>
<그래. 이따 보자!>
<오려고?>
<응.>
이번엔 연주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기남은 통화를 마치고 그동안 미뤘던 일에 집중하려 했다.
그때 정남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형, 아니 대표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된 거냐고”
“그래. 너 잘 왔다.”
“??”
“형수 유산한 건 아버지가 아시는 거 같으니까 우리 쪽은 다 괜찮은 거 같다고 말씀드려. 그리고...”
한참을 말없이 기남이 생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정남을 향해 다시 입을 뗐다.
“우리 아직 젊으니까 또 기회가 있을 거고... 암튼 염려 마시라고 말씀드려.”
“그런데 어쩌다 그런 거야 형수?”
“그게...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 얘긴 그만하자.
요즘 채유라는 어때? 반응 괜찮은 거 맞아?”
기남이 화제를 돌렸다.
기남의 의중을 눈치챈 정남이 답변했다.
“지우 곡에다 채유라 노래도 잘하고 감성도 좋아서 계속 상승세야.”
“지우 신곡 발표는?”
“그것도 거의 막바지야. 그런데 지우도 알아? 형수 일?”
“아니. 아직 모를 거야. 차라리 그게 나아. 멘탈 관리해야 할 때잖아.”
“그렇긴 하지만 가족인데... 그래! 형 말이 맞아! 아니 대표님 말씀이 맞는 거 같습니다!”
일부러 정남은 장난스럽게 말하므로 기남을 위로하려고 했다.
그런 정남을 보면서 기남이 말을 이었다.
“요즘 같아선 가족들 도움이 크다! 특히 너한테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 나 대신 회사일 많이 신경 써줘서.”
“에이! 형, 아니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농담 섞인 어조로 말을 받은 정남이 이번에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형수한테도 심심한 위로의 말 꼭 전해줘! 형수 상심이 크실 텐데 형이 물론 더 신경 쓰겠지만. 파이팅!”
기남은 점점 고민이 깊어져 갔다.
기남의 기억 속에 이번 해에만도 큰 사고가 또 하나 남아 있었다.
내년에도 역시 대형 사고가 터지는데 아무리 민식과 윤식, 그리고 혜린이 그리워도 천재가 아닌 인재를 외면하고 훌쩍 다음 생으로 넘어갈 순 없었다.
삶을 거듭할수록 기남의 마음속엔 하나의 신념이 자리 잡았다.
‘죽음의 문턱에 있던 날 살린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범죄자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 그리고 범죄자들도 억울한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암튼 그들의 억울함을 최소화하기 위했던 게 분명해!
그러니 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내 임무에 충실해야 하는 게 맞아!’
기남의 입장에선 무엇보다 지금까지 맺은 인연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사건과 사고로 억울하게 죽을 뻔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기남의 개입으로 인해 목숨을 건졌다.
현실에서 인희는 결국 동수의 계략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첫 번째 회귀에서 박흥식을 구해내지 못했다면 검사는커녕 그 또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기남의 아내가 된 연주는 또 어땠던가?
만약 기남이 없었다면 지우는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버티며 살아가고나 있을까?'
기남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정남, 잘 자란 기남을 보고 마음을 바꾼 기남의 아버지 남두철 등 회개한 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밖에도 그간 기남이 응징한 사악한 무리들은 반드시 처절하게 손봐줘야 마땅한 인간들이었다.
기남은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연주가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다.
인희는 연주를 위해 사골을 우리고 연주가 좋아하는 찬을 여러 종류 마련했다.
그간 연주에게 있었던 일을 모르는 지우는 잔칫상 같은 밥상에 환호했다.
“엄마! 누구 생일이에요?”
“아니. 그냥 먹고 싶어서 준비해 봤어.”
인희가 찬을 옮기며 지우 말에 대답했다.
연주 역시 준비된 밥상에 놀라움을 드러냈다.
“어머니!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내가 먹고 싶어 했다니까!”
그제야 연주 배가 홀쭉해진 걸 본 지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누나! 배가 왜 작아졌지?”
“...”
옆에 있던 기남이 입을 열었다.
“처남! 이번엔 아기가 안 태어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매형?”
“그게 그러니까...”
그때 인희가 나섰다.
“삼신할미가 점지해 주는 걸 깜박했대!”
“네?”
지우가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암튼 그러니까 이번엔 아기 없는 거야. 알았지?”
인희가 이렇게 말하자 지우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 다시 조카 생겨요?”
“그건... 아이, 밥이나 빨리 먹자. 배고프다!”
인희가 재촉했다.
그때 연주가 지우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꼭 조카 만들어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지우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식사 후 기남과 연주는 침실로 들어갔다.
둘만의 공간에 있게 되자 연주가 기남의 품에 안겨 입을 뗐다.
“이번에 당신의 존재를 다시금 느꼈어.”
“...”
“내겐 아이보다 당신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말이야.”
“...”
“하지만 아이도 갖고 싶어, 당신을 꼭 빼닮은 아이. 내 맘 이해하지?”
“응.”
“지우에게도 선물일 거야.”
“처남이 그렇게 조카 기다리는 줄 몰랐는데.”
“걘 어려서부터 강아지, 고양이 동물도 새끼들을 유난히 좋아했어.”
“...”
“지우가 엄청나게 사랑해 줄걸, 아마?”
“몸 완전히 추스르고 우리 다시 아이 갖자.”
연주가 그런 말을 하는 기남을 애틋하게 쳐다보다 그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살며시 갖다 댔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기남의 온몸이 순간 덥혀졌다.
화답으로 기남은 연주를 껴안은 팔에 한껏 힘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