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선생님의 센스는 어디가 끝인가.

엄마들이 주로 회원인 온라인 카페에 유치원 선생님 때문에 속상하다는 글이 올라왔다. 안 그래도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아동 학대 기사 때문에 엄마들은 우리 동네 어느 유치원/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촉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를 기관에 맡긴 이상 부모는 을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패배론부터 내 아이는 내가 지킨다고 선언하는 자강론까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방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공공의 문제를 개인의 일탈로 보지 않고 공론화하며 이를 집단지성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건 분명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임은 분명하다. 아무튼 이번에는 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눌러본 글은 나의 걱정을 너무나 민망하고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선생님 때문에 속상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아이 옷에 옷핀을 꽂았는데 그 꽂은 자리에 구멍이 나서 속상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옷에 흠이 생겼으니 엄마 입장에서 마음은 좀 쓰릴 수 있겠다, 싶다가도 이게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만큼 속상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글에 달린 댓글이 가볍지가 않고 세상 진지한 게 좀 의외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선생님께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정중히 컴플레인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큰 충격은 그 비싼 옷을 알아보지 못한 선생님의 센스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글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그냥 옷도 아니고 고가의 브랜드 옷에 이게 무슨 짓이냐며 이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분명히 주의를 주어야 한다는 말에 유치원 선생님은 알아야 하고, 해야 할 일들이 하나 또 늘었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유치원 교사는 아이의 보육과 교육을 넘어 옷 브랜드까지 살펴가며 옷핀을 꽂을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더불어 브래드 알못인 나 같은 사람은 센스가 없어 유치원 교사는 하지도 못하겠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엄마 손을 떠나 기관에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 아이가 걱정되고 안쓰러운 건 당연하다. 혼자서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아이인데 유치원이라고 해서 잘하겠나 싶은 노파심에 선생님에게 의지하고 부탁을 하는 마음은 누구든 가지고 있다. 행여 다치지 않도록 당부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관심을 부탁드리고, 밥 먹는 일로 선생님과 아이 모두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까 염려하여 먼저 선생님께 양해를 구한다. 이 세 가지만 잘 해결되면 엄마들은 대체로 안심하며 기관에 보낸다. 기본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본적인 요구사항을 넘어 지나치게 세세한 것까지 요구하는 부모도 많다. 아이가 콩을 싫어하니 아이 밥에 콩을 빼주세요, 우리 아이만 상을 못 받아서 속상해요. 기준이 뭔가요? 사진을 보니 우리 아이만 이상하게 찍으셨어요, 다음부터는 신경 써주세요. 등등. 엄마에게 아이는 한 명이지만 교사가 부모 한 명에서 하나씩만 이런 컴플레인을 받으면 스무 개가 넘는다. 그걸 기억하는 것도 힘들지만 더 힘든 건 이런 비본질적인 업무에 매달리다 정작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을 때 밀려오는 피로감이나 짜증일 테다. 그럼 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온다. 교사가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사진 찍을 시간에 한 번이라도 아이에게 집중해달라고. 중간 지점에서 타협이라도 할라치면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원성만 사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분명한 건 교사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느끼는 짜증은 결국 누구한테든 반드시 옮겨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누구 중엔 우리 아이들도 포함된다. 어쩔 수 없다. 교사도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니.



아직은 엄마 손이 더 필요하고 공동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다. 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을 적게는 열댓 명, 많게는 스무 명씩 한 공간에 넣어두고 안전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관리하고 보호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이게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교사의 임무이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교사가 그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협조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건 부모의 몫이다. 내 아이를 소중히 여겨달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 아이들을 소중히 여겨달라고 하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이 약도 안 먹여줘서 걱정이라는 엄마들이 의외로 많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선생님 말고 엄마에게 바로 먼저 전화하라고 한다. 사건이 벌어진 자리에 있지 않아도 엄마는 만능 해결사로 나선다. 엄마는 조력자의 역할로도 충분한데 아이가 커서도 해결사로 나서는 게 익숙해지면 결국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자신의 판단이 필요한 일조차도 엄마의 해결을 기다리는 어른이가 될 뿐이다. 적어도 자식이 독립된 한 개인이 되길 원한다면 부모의 만능 해결사 모드는 금물이다.

교사가 아이의 옷에 구멍을 낸 건 미안한 일은 맞지만 잘못한 일은 아니다. 비싼 옷을 사서 입히는 건 부모의 선택이지만 비싼 옷을 알아보지 못하고 구멍을 낸 건 선생님의 센스가 없어서가 아니다. 섬세하지 못한 선생님께 서운 할 수는 있지만 비싼 옷을 망가뜨렸다고 컴플레인을 거는 건 학부모의 불만이 아니라 소비자의 불만에 가깝다. 불만을 말할 수는 있지만 내가 가진 불만이 보편적인 입장에서 판단했을 때 상대방도 충분히 수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아이들을 돌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건 엄마 아빠의 지나친 ‘우리 아이 사랑’이다. 공동 교육기관에 보내면서 내 아이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지 않거나 교사에게 특별히 자기 아이를 잘 봐달라고 때로는 부탁하고, 때로는 명령하는 부모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부모지만 답답할 때가 많다. 어떤 사람은 그게 교사의 의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사의 의무는 특정한 사람에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나쁜 교사만큼이나 나쁜 부모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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