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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Apr 28. 2019

주재원은 '마술사'가 아니야

'함부로' '감히' 나 아닌 너를 평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주재원으로 해외에 나온 이후 약 4개월가량이 흘렀습니다. 말 그대로 시간이 '헐. 러. 갓. 습. 니. 다'

눈을 뜨면 새벽 공기를 마시며 회사로 가서 컴퓨터 On, 수능 공부를 하듯 업무를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업무를 이해하고, 그리고 이게 맞는 전략인지 아닌지 (경험이 없으니) 살짝 자신 없지만 실행 전략으로 상사를 설득하고 파트너사에게 요청했습니다. 창문 밖이 어두워지는지도 모르게 파트너사와 전화하고 이메일 하다가.. 아직 오늘 공부해야 할 챕터를 끝내지 못했는데 독서실을 나오는 찜찜함으로 퇴근길에 올라서는 하루가 그렇게 흘. 러. 나는 어느덧 120일가량의 경험치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해가며, 느꼈던 것은 내가 정말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구나 였습니다. 본사에서 주재원들의 카운트 파트너로서 일을 할 때에는 '내가 주재원이라면 더 도전적으로 이렇게 시장을 이끌어 나갔을 텐데... 왜 이 주재원은 이렇게 소극적일까' '내가 주재원이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프로젝트를 완수했을 텐데... 왜 이 주재원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주재원이라면 목표 달성은 거뜬히 했을 텐데, 이 주재원은 왜 이리 무능력할까.' '내가 주재원이라면 조금 더 전략적으로 사고할 텐데, 왜 이렇게 전략적이지 못할까.' '내가 주재원이라면 빨리 피드백을 줄텐데, 왜 이리 회신이 늦은 걸까.' 라며 주재원 '탓'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주재원이 되고 나서, 내가 왜 이렇게 쉽게 이런 말을 내뱉었을까를 후회했습니다. 


4개월 동안 정말 인생 최대 '열정'을 가지고 업무에 임했지만, '시장'은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전략대로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경제 상황이 안 좋아, 수요는 곤두박질쳤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시장과 소비자는 외면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본사의 요구사항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시장 수요가 왜 이렇게 감소했는지 분석해주세요."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주재원이 시장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실적이 저조합니까."라는 주재원 '탓'이 되어 돌아오더군요. 목표 달성의 실패에 대해서 누군가 책임을 지길 원했고, 본사의 많은 비난의 화살은 주재원 '저'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조속히 대책 방안을 송부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요구사항에 신. 속. 히 회신할 수 없는 저 자신을 발견하며, 본사에 있을 때 왜 이리 회신이 늦은 걸까.. 라며 주재원을 탓했던 내가 떠올랐습니다. 순간 너무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초라했고,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준 핀잔을 내가 다시 받아보니, 내 지난날의 무지와 이기심에 대한 결과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현재 시장을 분석해서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보고를 끝내고 나서 든 생각은, 정말 심플하게도 '역지사지'의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장이야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확장하고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것이 주재원의 숙명입니다. 그것을 부인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재원 한 명이 '요술 지팡이'를 휘둘러서 시장을 선도하고 경쟁사들이 다 어려워도 우리 상품은 독야청청 성장할 수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사에서는 주재원 1명이 정말 똑똑해서 '지지 않는 전략'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는 생각할 수 없지만 주재원은 생각해 내야 한다는 식으로 많이 접근합니다. 저도 그랬었고요. 하지만 '주재원이 신이 아닌 이상' 그런 전략을 낼 수는 없습니다. 


주재원은 시장의 변화를 읽고 우리 회사의 기회요인과 리스크 요인을 파악하여 전략적인 안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이 전략에 대해 본사에 있는 수많은 조직이 검증해서 더 나은 안을 제시하고 도출하도록 중간자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주재원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사에 있을 때, 한 주재원에 대해  이 분은 커뮤니케이션도 많이 없고, 별로 일을 많이 안 한다고 생각했던 분이 있었습니다. 막상 여기 와서 그 주재원과 함께 일을 해보니 그분은 정말 열심히 일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자기가 맡은 시장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시고, 성과를 내기 위해 부지런히 여기저기 연락하시면서 직접 발로 뛰시는 분이셨습니다. 보고서 쓰실 시간에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보고서가 많지 않아서 일을 많이 안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현장에 나와보니 화려한 파워포인트 보고서 쓸 시간이 없습니다. 본사에서는 보고를 위한 보고서, 의사결정을 위한 보고서 등 보고서를 참 많이도 썼었습니다. 그걸 잘하는 사람이 높은 평가를 받는 구조였지요. 하지만 주재원을 나와보니 보고서를 쓰려면 별도 야근을 하거나 주말에 나와서 시간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실적이 안 좋아 본사에 보고서를 많이 보내야 했던 나는 덕분에 매일매일의 야근과 주말 출근을 강행해야 했습니다. 그 주재원에 대해 '함부로' '감히' 일을 안 한다고 평가했던 나 자신이 그분 얼굴을 볼 때마다 부끄러워지곤 했습니다. 


요즘 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기존의 사업구조만으로 이익을 창출하기 힘들어지면서, 다른 산업과의 융합 특히 IT, 빅데이터, 핀테크, 모빌리티, 온라인 등 새로운 전략이 많이 필요해졌습니다. 경영층도 기존의 사업구조를 탈피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한 사업 확장을 많이 원하는 분위기고 이런 새로운 기회를 현장에서부터 찾아 제안하라는 지시사항이 많이 떨어집니다. 이에, 예전과 다르게 주재원들의 고도화된 역량이 필요해지고 있는 시점입니다. 기존의 영업활동도 하면서, 새로운 전략을 내야 하는데 정말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한계를 많이 느낍니다. 새로운 전략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부도 해야 되고 그 분야의 전문가도 만나야 하고, 조직적으로 새로운 전략을 기획, 실행할 수 있는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신선한, 경쟁사를 압도하는 전략을 하루아침에 만들어 내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기존의 영업활동이 좀 익숙해지면 스스로 새로운 전략을 낼 수 있도록 챌린지 해보려고 합니다. 비록 주재원이 '마술사'가 아니어서 '요술 지팡이'를 휘두를 수는 없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스마트하게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 수 있을지, 밥을 먹으면서도, 출퇴근 운전하면서도, 이 글을 쓰는 이 와중에도 생각해 봅니다. 생각의 꼬리의 꼬리를 물다 보면 '어딘가' '물려 드는 것'이 있겠지요. 


4개월의 주재 생활을 하면서 '겸손한 마음' '함부로' '감히'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된 다는 것. 특히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과 상황에 대해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겠다는 것을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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