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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피리 Oct 21. 2021

걱정의 실상

나 자신을 믿어주는 것. 그것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로 태어나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이지만, 내게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살다 보니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나와 지금 현재의 나 사이에 괴리감을 느끼기도 하고 엎치락 뒤치락하는 사람들 틈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나 자신을 회피하기 시작하면 마치 육체의 코어 근육과 같은 마음의 중심 ‘자신감’이 나도 모르는 새 약해져 나중에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도 혼자 픽하고 속으로 쓰러지고 만다. 걱정과 염려에 쉽게 노출되므로 불안한 마음이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오늘의 문장처럼 자신감을 잃어 마주한, 온 세상이 적이 되어버린 삶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걱정과 불안이 끝도 없이 따라다녀 보이지 않는 싸움을 계속하는 모습이지 않을까. 겉으로는 무던해 보이려 애쓰면서도 속에서는 계속 싸우고 있으니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일정량의 에너지를 여기에 다 소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로 오늘을 살자니 마음은 더 곪아가고 희미한 발걸음만 옮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루는 오빠가 일을 하는데 등이 너무 따끔거려 혼이 났다고 했다. 벌레를 떼어내기 위해 뛰어도 보고 옷을 털어도 봤지만 기분 나쁜 따끔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 고통의 정도는 ‘짜증이 날만큼’, ‘신경이 곤두설 만큼’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어떻게든 그날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가 옷을 벗은 오빠는 고통을 준 정체를 발견하고 기가 찼다고 했다. 손톱보다 작은 개미가 오빠를 물고 등에 콕 박혀 있었던 것이었다. 오빠의 하루를 망친 범인이 작고 작은 개미였다니... 너무 작아서 '작다는 것'을 표현할 때 자주 소환되는 그 개미였다니... 허무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오빠는 우리가 하는 걱정도 이와 같지 않겠냐고 말했다. 종일 걱정하는 것들의 실상이 사실은 이 개미처럼 별 거 아닌 거일 수 있다고,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온 신경이 집중되어 가뜩이나 따끔거리는 증상이 더 크게 느껴지는 이 형태가 우리가 걱정할 때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냐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랬다. 걱정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라 집중하면 할수록 괴상한 형태로 변형되곤 했다. 그리고는 자기와 연관된 친구의 친구까지 끌어와 내 머릿속 가장 넓은 방을 차지하고 주인인 양 한참을 머물렀다. 이 시점에서 의식적으로 끊어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불안과 걱정은 중독처럼 나를 찾아왔고 현재의 나를 금세 어디론가 데려가버리기도 했다.

한정된 나의 인생시계 속, 소중한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일어나지도 않은 혹은 이미 일어나서 지나가버린 곳 어딘가에 툭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때부터 오늘의 나는 더이상 보다 생산적인 일을 하거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없었다.


나라는 사람 자체에 걱정이 살짝 더해지는 양상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감과 희망을 가져가니 나는 점점 겁쟁이가 되어갔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던 내게 짠하고 나타난 오빠의 개미 이야기는 나의 맞춤 조언이 되었고 생각 전환의 효과또한 꽤 훌륭했다. 나는 이것을 이따금씩 찾아오는 불안과 걱정을 쫓아낼 때 유용하게 꺼내어 쓰곤 한다.




걱정의 실상을 기억하기에 도움이 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남기며 오늘의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어느 날 책에서 걱정에 대한 표현 '걱정을 잡아매라'를 마주했을 때, 걱정을 ‘그만해라’나 ‘그만두어라’ 대신 ‘잡아매라’라는 표현이 쓰인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다 내 나름대로 다음의 두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있었는데 첫째는 실상 없이 둥둥 떠돌아다니는 걱정의 파편들을 한 데 잡아 모아두어라는 의미, 둘째는 오빠가 들려준 개미 이야기의 연장선과 같은 의미였다. 즉 매우 높은 확률로 걱정의 정체는 개미가 문 것처럼 사소한 것일 수 있으니, 꼼짝 못 하게 잡아매어 두고 지금의 나에게 집중하라는 의미로 와닿았다.


나는 오빠가 나누어준 지혜와 아주 오래전부터 옛 선조들의 지혜를 담은 채 사용된 표현을 계속해서 되뇌어보았다. 의미를 깨달으니 그제야 내가 고생하지 않길 바라는 따뜻한 마음이 보였다. 마치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나를 가장 믿어줘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므로, 자신감을 가지라고 걱정을 잡아맨 채 가던 길 계속 걸어가라고 응원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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