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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종 Jul 30. 2019

당신의 선택이 의심스러울 때

나와 우리 사이의 만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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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선택이 의심스러울 때]

삶을 살다 보면 문득 “나의 선택이 ‘다른’ 선택이 아니라 ‘틀린’ 선택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이유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느끼는 큰 이유는 ‘내 선택에 대해 모두가 틀렸다고 말할 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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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탐닉하던 한 역사학자가 있다. 그가 저술한 한 권의 책은 자신의 이름을 모두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바로 그가 [호모 루덴스]를 저술한 ‘요한 하위징아’이다.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하는 인간’ 개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놀이’가 가진 다양한 측면과 함께 놀이에 참여하는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이야기한다.

그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쉬이 지나치지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문장이 있다. “편법과 불법은 용서해도 파괴자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는다.” 이 문장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장이 이야기하는 놀이의 매우 중요한 요소는 ‘참여자들’이다.

놀이에는 나 이외에 많은 참여자들이 존재한다. 이 참여자들은 놀이에서 편법이나 불법을 사용하는 것은 용인되거나 용서하며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놀이의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자비란 없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축구 경기를 한다고 하자. 경기하며 반칙을 하거나 몰래 규칙을 어긴다고 하여 어느 정도 비난을 받더라도 그 아이는 무리에 속해있는다. 그러나 그 경기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아이에게 주어지는 무리의 자리는 없다.

역할 놀이를 하는 데 있어 역할이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마음대로 설정하는 것은 용서되지만 “그게 뭐야”라며 가상의 세계를 파괴하는 자에게 용서란 없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지킬&하이드]로 유명한 로버트 L. 스티븐슨은 자신의 저서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밝혀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애써 오르는 산을 오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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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서 취향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왜 중요한가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그래서 예술은 ‘개인의 취향’ 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매우 관심이 많다.

‘한 개인의 취향’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연구에서 꽤 지지를 받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언제나 ‘감정’이라는 것과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감정’을 만들어내고 경험에 대한 일차원적 판단은 그 감정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거 어땠어?”라는 짧은 질문은 풀어 말하면 “그 경험과 경험을 통한 너의 감정은 어떠했어?”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리고 질문의 의도를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내용은 좋은데 난 별로”또는 “엄청 좋더라”라는 말 모두 질문에 내포된 경험과 감정의 의도를 파악한 답변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감정을 계속 쫓으며 그 감정을 느끼게 해줄 경험을 쫓는다. 그리고 여기서 ‘취향’이라는 것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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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감정-선택-경험-감정
징크스 라는 것의 프로세스 역시 취향의 프로세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논의가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모든 사람은 각자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감정을 따라 다시 경험한다. 한 마디로 자신이 좋다고 믿는 것, 단순히 좋음을 넘어 그것을 옳다고 믿으며 계속해서 선택한다.

‘좋음’은 그렇게 우리에게 ‘옳음’이 된다.
그리고 그 길을 가지 않는 사람, 그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 그 산을 오르지 않는 사람은 옳지 않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찾은 허수아비, 사자, 양철 나무꾼은 누군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할 때 “너 자신을 돌아봐”라고 말할기 보다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 봐”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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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좋음’이라면 나도 좋을 가능성이 높고 결국 그들의 말이 옳은 것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하지만 ‘좋음’이라는 다소 모호한 이 감정은 직접적인 경험이라는 한 가지 대상으로부터만 나오지 않는다.

아렌트는 인간이 원하는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바로 ‘우리’로 불리는 일, ‘무리’에 들어가는 일 이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일에 기저에 깔린 감정은 바로 ‘안정감’ 이다.

자아를 발견하는 만족감과 우리라고 불려지는 안정감의 대립. 인간 존재의 본질이 결국 ‘관계’를 전재로 하는 이상 ‘안정감’을 쉽게 모른채할 수 없다.

결국 많은 사람들의 ‘좋음’에는 자신의 선택이 다른 이들의 선택과 다르지 않았음에서 오는 ‘안정감’이 주는 ‘좋음’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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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개인의 정체성’이란 푸코가 밝혀냈듯이 각자의 ‘다름’에서 생겨난다.

‘나’라는 개인의 선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선택이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모두가 오답이라고 할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진리가 다수일 수는 있어도
다수가 진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수는 언제나 자신이 진리이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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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선택을 당신이 더욱 사랑한다면
다른 이들의 지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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