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이가 떠난 지 오늘로 94일째이다.
씩씩이가 떠난 이후로, 더 정확히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지독한 펫로스 증후군을 겪고 있는 중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특히 밤 사이 잠을 푹 자고 아침에 개운하게 눈을 떴을 때도 불현듯 씩씩이가 암으로 고통받던 당시 모습이 뇌리를 스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른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의 무게와 그 감정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한 생각은 안락사로 녀석을 편하게 보내주었어야 했나 라는 소용없는 후회이다.
씩씩이 입양 직전 3년을 함께했던 강아지 '청아'도 자연사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방광암이었던 씩씩이와 달리 청아는 심부전으로 약 8개월간 약물치료를 하며 호흡부전을 잘 견뎌왔기에 음식도 잘 먹었고 호흡곤란 외 통증 조절도 필요치 않았다. 청아는 상태가 악화되어 죽음에 임박했을 무렵에만 약 기운이 떨어지는 새벽 시간대에 호흡부전으로 힘들어하다 약 증량을 고려하고 있을 즈음 급작스레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하지만 암은 아니었기에 극심한 통증도 없었고 뭐든 잘 먹어 씩씩이만큼 긴 시간 고통받지 않았다.
씩씩이가 방광암으로 8개월 투병하는 동안 머지않아 무지개다리를 건너리라는 것은 의료인으로 암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내게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한 점의 후회조차 남기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 직장에 출근하는 시간 외에는 내 모든 시간을 씩씩이와 함께 하며 헌신했다. 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고,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한 것만 같은 간절함으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사랑한다고 온 몸으로 말해주었다.
하지만 내가 붙잡고 있었던 그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헛된 환상, 내지는 욕심이었는지 점점 깨닫고 있다.
점점 줄어드는 생명의 유한한 시간 속에서 안타까움에 마음만 동동 거리다 한 생각을 신념 삼아 붙잡으며 힘겹게 버티다가, 그 생각이 참된 진리라도 되는것 처럼 내 몸과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몰두하고 매진했다. 그게 내가 할수 있는 당시의 최선이었고 당시의 내게 정답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아파했던 씩씩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통스럽고 아프다.
아마도 그 투병과정이 내 영혼에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것 같다.
고통스러워했던 씩씩이의 모습과 그 모습을 오롯이 지켜보며 함께했던 나!
씩씩이와 함께했던 총 9년의 시간 중 아팠던 시간은 고작 8개월에 지나지 않음에도 왜 그 시간만 유독 깊게 마음에 남은 건지 모르겠다. 당시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치 차가운 얼음판 위에 맨 발로 서 있는 느낌이다. 서슬 퍼런 칼날에 심장이 베이는 듯하다.
생명을 보호하고 돌봐줄 의무는 있지만, 내 손으로 생명을 거두어줄 의무는 없다며 안락사를 거부했던 내 고집이 씩씩이에게 극한 지옥의 고통을 겪게 한것은 아닐까
자책이 밀려온다. 반대로 안락사를 선택했다면 지금쯤 어떤 후회를 하고 있을까도 생각해 본다.
암으로 고통받던 씩씩이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트라우마를 겪는걸 보니 당시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자연사 역시 완전한 선택지는 아닌듯 하다.
또 반대로 안락사로 떠나보냈다면 사랑하는 녀석의 생명을 거두었다는 극심한 자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마음을 깊이 나누었던 사랑했던 대상과의 이별은 도저히 적응 불가의 난제이며, 매번 처음 겪는 일 마냥 고통스럽고 새살 역시 쉽게 돋지 않는것 같다.
자식 같던 반려견을 떠나보낸 사람은 이 고통의 실체를 알 것이다.
이제 내 유일한 반려견으로 새롬이만 남았다.
새롬이의 시간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벌써 아프다.
씩씩이를 떠나보내고 나니 새롬이의 죽음은 최대한 덜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 죽음의 과정에 고통이 일체 수반되지 않을 수 없겠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빌어 새롬이는 정말로 편안하게 데려가셨으면 한다.
새롬아.
엄마는 너의 남은 시간을 미리 계산해두지 않으려고 해.
한 가지 바라는 점은 엄마가 씩씩이를 떠나보낸 상실의 아픔이 아직 치유되지 않은 만큼 엄마의 마음 안에 새살이 돋을 때까지 지금 만큼만 산책 다니고 잘 먹고 잘 자며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