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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면지언니 Oct 04. 2022

독립, 기획자로 살기

전주문화재단 웹진 <온전> 제6호 기획, 기획자, 기획이라 부르는 것

예술을 만나는 순간 관객의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관객들에게 이런 순간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참여했던 예술 프로젝트들이 점점 나의 일이 되고, 직업이 되고, 나를 설명하는 말이 되었다. 기획자로 살기로 했다.

탐구하는 것이 즐겁다  ⒸJihyun Kim 제공


기획(企劃) : [명사] 일을 꾀하여 계획함


누군가 어떤 일을 하는지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한다. 공연을 만들고 축제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기획자입니다. 나를 제일 잘 설명하는 말이 기획자인 것 같아서 기획자라고 했는데, 이내 질문이 돌아온다.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하지 않는 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묻는다. ‘기획자라면, 영화 감독 같은건가. 공연이랑 축제를 만든다는데 그럼 연극 연출이나 무대 연출 같은건가.’ 이해를 돕다보면 나의 설명은 주로 이곳 저곳을 서성인다. 영화 감독이 연극에서 연출이라면, 기획자는 재원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제작하는 공연의 전반을 관리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작품의 지금을 살피고 미래를 상상하면서 그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이해한듯 이해하기 어려운 듯 반응이 돌아온다. 왜 이렇게 정의하기 어려운 직업을 선택했을까. 기획자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한 청년 기획자 네트워크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답한 적도 있다.


“예술을 수행하면서 없던 것을 직접 창조하는 사람은 창작자인 거 같고, 저는 있던 것을 매개해서 새로운 것을 직조하는 기획자에 더 가까운 거 같아요. 기획자가 무언가를 매개하고 판을 짜서 판에 각각의 요소들을 위치시키기 전까지는 그것이 존재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죠. 기획은 무언가를 보이게끔 도와주는 일이 아닐까, 연결하고 판을 짜고 그 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이 기획자인 거 같아요. 기획자가 가지고 있는 창조성은 바로 그런 것인듯해요. 상상만 하고 멈춘다면 기획자가 아닌 것 같고. 상상한 것들을 실현되게 만드는 것, 그런 게 기획자인 거 같아요. 너무 추상적이죠?”


기획에 대한 정의를 조금 더 찾았다. HRD 용어사전(2010, 한국기업교육학회)과 행정학사전(2009, 이종수, 대영문화사)은 ‘기획(‘Planning)’을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의 변화 목적을 확인하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설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산출물인 계획(plan)은 사업(project)과 내용(program)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목적을 정의하고, 목표를 개발하고, 자원을 확인하고, 대안을 만들거나, 대안의 선택하고 검사하며, 최종 계획을 결정하는 것이 기획의 과정에 속한다.


행정학사전은 기획의 정의에 몇 가지 특성을 덧붙이는데, 미래 지향성, 합리성 추구, 통제성이다. 마치 성격검사라도 받는 것처럼 나는 그런 기획자였는지 살펴보며 다시 정의해보았다.

■ 현재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들을 한다.
■ 지금 우리의 선택이 가장 효율적인지, 다른 대안이 있는지, 필요한 자원이 있는지 파악한다.
■ 누군가에게 내게/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이 있다면 어떻게 조달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환경과 자원을 관리, 감독하고 수정하고 통제하는 일을 책임진다.
■ 목표의 달성을 위해 계획이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합의를 도출한다.
■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 환경의 변화에 따라 계획을 변경하며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융통성을 발휘한다.


써내려가다 보니 기획이라는 것은 제법 목표 지향적인 일이었다. 그럼 그 목표는 무엇이기에, 그리고 나에게는 어떤 동기가 있었기에 기획자가 되기로 한 것이었을까.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직업적 소명이라는 멋진 말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었다. 다소 자기주관적으로, 그리고 자기배려의 관점으로 스스로의 직업적 소명, 동기를 좀 더 정리했다. ‘좋아하는가’, ‘즐거운가’와 같은 말들이 모든 문장의 끝을 맺는다.

■ 예술을 좋아하는가
■ 예술가를 좋아하는가
■ 관객을 좋아하는가
■ 예술이 관객에게 말거는 순간을 좋아하는가
■ 새로운 발견을 좋아하는가
■ 상상을 현실로 구체화하는 것이 즐거운가
■ 예술과 관객을 위한 설계를 구상하는 것이 즐거운가
■ 예술적 개입이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실현되는 것이 즐거운가
관객을 만날 준비를 하며  ⒸGoguma 제공


좋아서, 즐거워서 시작한 일,

아직도 이 일이 좋아?


어느 날의 일터에서 동료 기획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직도 이 일이 좋은지 서로에게 물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인 것은 분명한데, 여전히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넘어야 할 고비들이 많다. 특히 기획자로 스스로를 정의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수많은 일들 사이를 ‘메뚜기 뛰듯이’ 옮겨 다녀야 하는 불안정과 불안이 컸다. 함께 축제 기획을 하던 동료들과는 안정적으로 기획의 일을 보장받기가 힘든 한국 축제의 구조가 ‘메뚜기’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봄에는 이 도시에서 일하고, 가을에는 저 도시에서 일을 했다.


본격적으로 ‘독립 기획자’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고민들이 한참이던 시기였다. 프리랜서도 아니고, 프리워커도 아니고, 1인 기업도 아니고, 독립 기획자라니. 가뜩이나 기획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어려운데, 독립이라는 말까지 붙어서 더 어렵게 느껴지려나. 독립을 앞에 붙이고 기획을 한다니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일까.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것일까.


독립. 흔히 인디(Independence)라는 영어로 번역되는 이 단어에는 저항이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데, 혼자를 진정 혼자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향하여 저항하겠다는 선언이자 실천적 지향성을 담고 있다.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서, 또 특별히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 속에서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 독립이라는 단어를 복기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본의 논리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한, 세상의 편견과 익숙한 정서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한 진정한 혼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혼자를 누리는 일'  <‘독립만세’를 외치고 싶은 이유> 中  - 이관택 (독립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영화 감독 이관택의 말에 많이 공감했다. 어쩌면 독립이라는 단어를 기획 앞에 붙인 이유는, 여전히 우리의 기획, 그리고 기획자들이 주도성, 주체성을 가지고 일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기에 필요한 말일지 모르겠다. 어딘가에 완전히 소속되어 있지 않은, 스스로의 성장과 발전은 스스로 책임지는, 기어이 홀로 서기로 한 이들이다. 권력이나 시스템으로부터 불완전하게 나마 자유를 선택한 셈이다. 자유로워 보이는 삶을 산다. 정형화되지 않은 일 속에서 스스로 조직이 된다. 직함도 직계도 없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하는 일들을 분리해본다. 독립 기획자라고 부르고 나니, 기획이라는 일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 오롯이 기획하는 사람이다.


노트북이 있는 곳이 일터  ⒸJin Yim 제공

스스로의 일과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 언어들이 필요했다. 예술가들에게는 매개자, 중재자, 관리자로서의 기획자들 뿐만 아니라 행정, 운영, 홍보, 그리고 그밖의 여러 일들을 함께 해주는 동료가 필요했고, 종종 그 일들은 ‘기획’이라는 말로 얼버무려졌다. 어떤 순간이 오면 이게 ‘기획’의 영역에 해당하는 일인가 고민하는 것이 무색해지기도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들은 참 많았고, 누가 이 일을 해볼지를 살필 시간은 없었다. 남는 일들은 대부분 기획자들(혹은 조연출들)의 역할이 되었다. 하지만 기획이 좋아서, 기획의 일을 하며 살피게 되는 세상이 좋아서, 여전히 다시 기획의 길을 걷는다.


할머니가 되어도 여전히 기획하기를 좋아하는 나를 상상해본다. 어쩌면 해시태그 작명소 같은 것을 차려서 누군가에게 해시태그를 점지해주고 있을지도 모르고, 할머니 기획자들이 모여서 지팡이 짚고라도 가서 놀 수 있는 클럽을 만들지도 모른다. 영원히 기획자 같은 삶을 사는 나를 상상해본다. 밀린 일이 산더미이지만. 이 원고의 마감도 이미 늦었지만. ✦



전주문화재단 웹진 <온전>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http://onjeon.jjcf.or.kr/main/?menu=38&mode=view&no=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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