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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가정의 기준

내 안의 애어른을 만나다

by Slowlifer

한달에 한 번 아빠를 만나러 갔다 돌아오는 길은 내가 가장 감정적으로 취약해지는 시간이다.


돌이켜보면 늘 부모님을 만나는 일은 내게 일종의 아주 오래 된 무거운 의무감과 책임감에 의한 행동으로, 늘 그 무게가 버거웠고 힘들었다.


내 동생은 웃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곤 한다.

누나는 아빠에게 가스라이팅을 제대로 당한 것이라고, 아무리 부모라도 내 자신이 힘들지 않을 만큼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나보다 더 어른처럼 일러주는 동생의 해법이 아직도 나는 와닿지 않는다.


대체 그 정도가 어떤 것인지,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감정 소모가 심한데도 부모님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인지, 정말 가스라이팅 당한 것인지, 어린시절 받았던 사랑의 기억 때문인지, 나조차도 여전히 혼란스러우니까.


점점 눈에 띄게 악화되는 아빠의 병세를 확인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미 너덜해진 내 마음음 여전히 분주하다. 죄책감과 책임감의 그 사에서 널뛰기를 한다.


그 무엇보다 내 몸과 마음을 가장 최우선으로 다스려야 가족도 있고, 일도 있고, 다음의 삶이 있다는 것을 혹독한 경험을 통해 이제 겨우 알게 되었는데 여전히 그게 가족에게, 아빠에게는 잘 적용이 되지 않는다.


아빠를 보고 나면 너무 힘이 들어 며칠씩이나 후유증을 감수해내야하는데, 아빠를 보고나면 더 자주 찾아가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늘 보통의 가정을 꿈꿨다.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혼란스러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영상 하나를 틀었다. 세상 오만가지의 고민을 참 별거 아니구나 느끼게 만들어주시는 분이라 마음이 힘들대마다 가끔 찾아듣곤 한다.


고민을 듣고있자니 저런 질문에 대체 어떤 답을 줘야하지? 생각이 드는 나와 달리 술술 답을 주시는 스님의 그 내공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요지는, ‘보통’ 이라는 기준은 남이 아닌 내가 만든 것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남들이 말하는 그 보통의 기준을 잣대로 자신의 상황과 비교를 하니 고통이 생기는 것

이라고.


그 말씀을 들으며 떠올랐던 결혼 준비시절 남편이 내게 해줬던 말.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게 어디있어, 이런 가족도 있고 저런 가족도 있지.”


내 결혼식을 앞두고 집 나간 엄마, 결국 황혼 이혼을 한 부모님, 그간 삶을 숨길 수 없는 엉망진창인 고향집의 모습, 술에 절어 여전히 방안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아빠의 모습을 예비신랑에게 공개하는 게 부끄럽다 못해 고통스러웠던 내게 더없는 위로가 되었던 그 한마디.


맞다.

다행히 내게는 법륜스님만큼 건강한 정신을 가진 남편이 있었다.



내가 늘 괴로웠던 원인은 거기에 있었다. 내가 가진 결핍을 스스로 보통이 아니라고 여겨왔던 어린시절,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여전히 자라지 못한 어른의 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은 인생 전체에 필요한 일이라는 걸, ‘비교는 암’이라는 불편한편의점 소설속의 그 말 역시 여전히 되새기고 되새겨야 할 진리라는 것.


나는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가난했고, 부모님의 잦은 불화 속에 자라 불안이라는 감정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


서른 중반에 아빠 병수발을, 이혼한 부모님을 차례로 찾아다니며 챙겨야 한다는 사실,


이 모든 사실을 내가 만든 ‘보통의 기준‘에 비교하는 일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슬프면 슬퍼하고

아프면 아파하되,


자꾸만 지금 현실을 소용없는 과거로 끌어가 비교하지 않기.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고통을 가장 빨리 없애는 일이라는 것.


그렇게 나는 오늘도 지금 이 슬픔을 글자로 꼭꼭 눌러담아 내어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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