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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희귀병을 받아들인다는 것

by Slowlifer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는 아직까지도

거기에 멈춰 서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아빠의 보호자가 아니었던 시절,

아빠가 나의 보호자로 존재했던 그 때.


아빠가 내게 큰 존재였던 그 때.


같이 등산을 다니며 내리막이 무섭던 어린 딸은

아빠가 내밀어주는 그 두껍고 굵었던 손바닥을

그 무엇보다도 의지했고,


깊은 바닷물에서 오가지 못하던 키 작은 어린 나를

번쩍 들어안아 발이 닿는 곳으로 옮겨주던 아빠,


운전하는 것은 까마득히 먼 어른의 이야기였던

여전히 풋내기였던 시절

어디든 내가 가고싶은 곳에 데려다주는

나만의 전용 운전 기사가 되어주던 아빠.


무거운 짐을 양손 가득 들고도 나를 거뜬히 안아주던,

그게 당연하던,

그게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내겐 그런 큰 존재였던 나의 아빠.


이제는 아빠의 휠체어가 갈 수 있는 땅이 고른 곳을 찾아다니고,

아빠가 흔쾌히 불편을 감수하고도 꼭 함께 데려가 주었던 자연 곳곳을 휠체어 타고는 어렵다는 핑계로 감수하기를 망설이는 작아진 아빠의 보호자가 된 나.


이제 아빠 없이도 자유자재로 전국 곳곳을 운전해 돌아다닐 수 있지만, 아빠가 보여줬던 세상의 100분의 1도 아빠에게 보여주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무조건적인 것임을 알아간다.




아빠가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을 진단 받은 건

내 아이가 태어난지 백일이 갓 지낫을 때였다.


머지않아 휠체어 신세가,

또 머지 않아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만 하는 신세가

곧 올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는데

무섭게 진행되는 병세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나는 아직 그 어린 딸인데,

뭐든 다 해주던 그 커다란 아빠의 딸인데,


여전히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아빠의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도무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답이 떠오르질 않고

그냥 속수무책으로 슬프기만 한 이 마음을

대체 어떻게 다스려야 좋을지,


내 안의 이 어린 아이는

어떻게 달래주면 좋을지,


어떻게 그 과거에서

현실로 데려와

이 모든 걸 담담히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나는

아빠가 너무 그립다.


그리워서 미칠 것 같다.


자신이 없는데

정신과 다르게 몸이, 뇌가 먼저 죽어가는 아빠를

지켜보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삼켜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속수무책으로 마음이,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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