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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A Jul 03. 2022

좋은 선배

1탄 : 실수를 피할수는 없어

신입사원 때는 마케팅 업무를 했었다. 

당시에는 DM(Direct Mail)이 주요 채널이었고 채널비용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채널 관리 효율성이 지금보다는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타게팅 방법론을 개선하고 그에 맞게 데이터 작업을 해서 협력업체에 넘긴 후 효과 분석하는 것, 이를 통해 기존 방법을 업그레이드해 나가는 것이 마케터의 루틴이었다. 나는 데이터 직군이었기 때문에 타게팅 룰을 관리하고 데이터 작업을 해서 고객 리스트와 관련 정보를 업체에 보내는 일련의 일을 맡게 되었는데 입사 한 달도 되지 않아 하필이면 사수가 결혼을 하는 바람에 업무가 손에 익기도 전에 실전에 투입되었다. 사수가 없는 동안 업무를 충실히 해내기 위해 긴장하고 데이터 작업을 신경 써서 한다고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제외해야 하는 대상을 미처 다 제외하지 못한 채로 고객 리스트는 업체에 넘겨졌고 그다음 주부터 민원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사수는 꿈같은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나와 고객 민원에 치이며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나는 창피함, 당혹감, 자괴감, 미안함이 뒤섞인 불안정한 감정으로 모니터를 보는 틈틈이 사수의 표정을 살폈다. 사수는 내게 화를 내지도 위로를 하지도 않았지만 내 감정은 그가 무슨 말이라도 걸면 순식간에 빵 터져 버릴 만큼 의 울음이 준비되어 있었다. 며칠 후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선배는 나를 조용히 불러 이야기했다. 

"나 없는 동안 혼자 일처리하고 민원 처리하느라 수고 많았어. 오자마자 공교롭게 신혼여행 간다고 들떠서 버거운 일을 넘기고 간 것 같아 미안하다. 그런데 시점의 문제일 뿐, 이 일은 언젠가 네가 맡아야 할 일이었고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실수는 일어날 수 있는 거야. 일을 하다 보면 그 누구도 실수를 안 할 수는 없어. 그러니 이번 실수에 너무 의기소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실수했다고 해서 네가 잘못했고 실력 없다고 생각하는 팀원들은 없어. 그래서도 안되고... 그러니까 너무 죄인처럼 다니지 마라. 다만 알아두어야 할 건 개인의 실수든 사고 든 간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로 실력 차이가 나. 사고가 번지지 않도록 재빨리 수습하고 벌어진 일에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는 거야."

입사 초창기 그렇게 눈물겨운 사단을 겪긴 했지만 사수의 신혼여행과 조언 덕분에 나는 동기들과 비교해서는 비교적 빨리 단순 백업이 아니라 내 업무를 꿰차게 되었고 자잘한 실수와 수습을 반복하며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실수와 수습이라는 일련의 사이클을 겪으며 이 일은 내 것이라는 온전한 책임감이 생기기도 했다. 

 일을 하다 보면 동료 실수로 제휴사에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해야 할 일이 생긴다. 한두 번 실수에는 "괜찮습니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죠. 다음에 신경 써주세요."정도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도 사람인지라 동료에게 화가 나고 정작 제휴사에 빌빌거려야 하는 사람은 나인 것이 짜증이 난다. 나는 어릴 때 이런 일에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나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그럴 수도 없는 현실이,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 '너는 아웃'으로 빨간 줄을 그으며 아닌 것을 아닌 채로 둘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럽기도 했다. 대낮부터 몇 년 전에 끊은 술 생각이 났다. 그러다 문득 내 실수를 감싸고 두고두고 남는 조언을 해주었던 선배 생각이 났다. 나는 참 좋은 선배를 만났었구나. 그런데 나는 배운 만큼 하지 못하고 있구나. 그래서 고민 끝에 선배가 내게 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메일로 적었다. 그런데 그 이후 한 달 동안 발송을 못하고 있다. 요즘 좋은 선배의 조건은 먼저 청하지 않은 조언은 하지 않는 것이란다. 그래서 어쩌면 그 편지는 저장함 속에서 화석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치열하게 일하고 실수하고 수습하며 괴로워하는 직장인 중 누군가에겐 내게 도움이 되었던 선배의 메시지가 위로와 보약이 되지않을까 싶어 이곳에라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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