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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 Liv Aug 23. 2021

나에게는 산후 우울증이 안 올줄 알았는데

아이를 가지게 되면 당연히 산부인과에 간다.


그냥 진료만 하는 줄 알았던 산부인과에서도 엄마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임신을 하고 처음 알았다.


문화센터에는 아이를 잘 낳기 위한 짐볼 운동, 출산 준비 교육 등이 주를 이뤘지만 그중에서도 상담 심리사님이 진행하는 마음건강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배를 보며 행복하기도, 불안하기도 했던 임산부 시절


하지만 기대를 하며 들어갔던 첫 수업에서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이를 잘 키우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법을 알려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엄청 힘든 고난의 과정이라며 겁을 주었고, 심지어는 "여기 '나는 산후우울증 같은 건 안 걸려'라고 생각하는 분들 계시죠? 제가 100% 확신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산후 우울증이 와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설마 나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에 있어서는 자신이 있었기에 괜스레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라고 생각하며 그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나름 변명을 해보자면 당시 내가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던 것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1. 당시 발달장애인 사회성 교육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었는데,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필드에서 부딪히며 일을 배웠고, 실무 경험을 토대로 대학교들과 산업협력을 하는 일도 종종 있었기에 "발달", "교육"이라는 키워드에 자신이 있었다.


2.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및 교육과 관련된 다큐를 보는 게 내 취미였고 심지어는 결혼 전부터 육아서를 즐겨봤다.


3. 여러 험한 상황들을 잘 버텨내야만 했던 복잡한 유년시절이 있기에 그런 시간을 잘 이기고 버텨낸 자신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선생님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은 걸 굉장히 후회하게 되었다.


이 조그마한 몸으로 얼마나 사람을 고생시키던지, 매일 몸살 기운을 달며 키웠던 신생아 시절


중요한 포인트부터 말하자면 나는 육아계의 금수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부터 3개월까지 친정어머니가 집에서 상주하며 아이를 봐주셨으며, 아이가 100일이 되던 때 친정이 5분 거리로 이사를 왔고.

20대 초반 패기 어린 창업으로 인해 다 끝내지 못한 학부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는 생후 2년간 거의 할머니네 살다시피 했다.

종종 '나를 엄마라고 하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산후 우울증*이 왔다. 아니, 산후 불안증이 조금 더 가까운 표현처럼 느껴진다.


아이를 낳고 3년간 명치 부근에 심장이 새로 생긴 건가 싶을 정도로 항상 쿵쿵 뛰는 심장박동을 느꼈고,

매일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 정도로 걱정에 잠을 못 이루며 밤새 뒤척였다.

때때로는 잠든 아이 얼굴을 보면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어디서 시작된 지 모를 엉겨 붙은 두려움에 엉엉 울기도 했다.


하지만 때때로 힘들다는 것을 주변에 나눌 때면, 나를 도닥여 주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네가 힘든 게 뭐가 있냐'라는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또 '그래 주변에서도 다 도와주고 있는데 뭐가 힘들다고 매일 그래'라며 스스로에게 핀잔을 주고 자책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 삶은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 같았다.

특히 남편과의 대화에서 남편이 나를 위하는 마음에 했던 이야기들조차 '나를 무시해서 저런 말을 하는 거다'라고 생각할 만큼 남편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같이 커져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추천을 받아 상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엄마 손을 쪼물딱 거리며 잠든 아이를 볼 때면 눈가가 항상 촉촉해졌다. 호르몬 탓도 1-2년이지, 3년이 다 돼가니 이건 마음의 문제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상담을 받아보겠다 결심했을 때 처음 떠올렸던 이미지는 포근한 인상의 선생님이 앞에 앉아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는 것이었다.


다행이 주변의 추천을 받아 찾아간 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대했던 바와 같이 창가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포근한 인상의 선생님께서 푹신한 소파에 나를 안내해주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홀린 듯 준비한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선생님께 내가 너무 힘들고, 아이 키우는 것을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자괴감을 느낀다, 나의 힘듦을 받아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이 밉고, 그런 생각을 하는게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나의 이야기를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그 자체에 내가 켜켜이 쌓았던 둑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 사실 저는 육아도 어머니한테 많이 의지하고 있고, 집안일도 잘하지 못해요. 다른 사람들도 다 겪어내는 일인데 제가 이렇게 힘들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는 엄마가 된 뒤, 내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조차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연수 씨,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연수 씨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진실'이고 우리는 그 진실을 바라볼 거예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며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무시하고 비난하지 마세요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서야 조금씩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뭐라고 바라보든, 내 마음이 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출발이었다.


내가 힘든 것이 내 노력 부족만이 아니라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주변의 상황들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내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범위를 설정해두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대안을 물색했다.


집안은 어느 정도 지저분하게 두고 일주일에 두 가량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고,

코로나 상황이지만 장기전을 위해 어린이집에 보내며 너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독였다.

밥은 최대한 외식으로 해결했고 커리어에 대해서도 작지만 단단하게 성장해 나가면 된다가치관을 다시 정립했다.


스스로를 가두던 부담을 벗어 던지자 비로소 아이와의 시간을 온전히 기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 과정에서 지갑은 조금 홀쭉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선택해 주변에 남은 것들에 대해 더욱 감사하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채워지는 에너지들로 더 큰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나에게 막연히 남아있던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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