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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트밀리 Apr 21. 2021

3. 섹스와 숙제

누구보다 엄마가 되고 싶은, 숙제라는 단어에 생기는 무게감에 관한 이야기

언젠간 웃으며 돌아볼 난임 이야기입니다. 저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라면 경험을 나누고 함께 공감하고 싶습니다. 주변에 난임을 겪고 있는 이웃의 지인 분이라면 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소중한 생명을 기다리는 모든 분들의 임신 성공을 기원합니다. 
<침대 머리맡, 늘 다정한 원앙 한 쌍>

조금은 부끄러웠던 그 단어 '섹스'가 고달픈 단어 '숙제'로 돌아왔다.

유부녀가 된 지금의 나와 아저씨가 다 된 남편도 성향상 섹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진 않았다. 그래도 우리에게 그것은 자연스러움이고 서로를 기분 좋게 하는 즐거움이었다.

특히 결혼하여 함께 사는 지금까지 '에헴, 오늘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함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숙제(의사선생님께서 지정해주는 배란일 전후로 수정될 확률이 높은 날 해야하는 일)' 라는 이름을 달자, 표현은 더 거침없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삼십몇 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미세한 체온상승과 배란통, 배란 점액(이런 것들은 정말 살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이 지금이 배란일이 임박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남편들은 그것을 본인인 여자만큼 잘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보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병원에 가서 배란일을 받아오고 남편에게 '오늘이랑 내일모레가 숙제 날이야'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 말은 오늘이랑 내일모레 섹스하는 날이야와 같은데 말이다.


그냥 갑자기 결혼식 날짜를 잡기 위해 좋은 날짜를 받아 왔던 것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그때는 궁합과 사주로 날짜를 받아왔는데 아이가 생기는 날도 이렇게 받아오게 되는구나. 그 배경이 미신과 의학이란 큰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쾌락을 상기시키는 '섹스'가 누군가(학생 시기를 보낸 대부분)에게 '숙제'가 된 순간, 그에 대한 정의는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정의 내려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부담감과 불편한 책임감이 생겨난다. 입술이 닿는 것부터가 어색하고 그다음 단계들도 어색해진다. 불필요한 과정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며 즐거웠던 과정보다는 성공이냐 실패냐라는 결과 중심점 사고로 변해버린다.

옛날부터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수없이 받아 온 가르침이 너무 쉽게 역전되었다.


난임이라는 것은 이렇게 인생의 또 하나의 즐거움을 앗아간 느낌이었다.


처음 몇 달 간은 더 크게 어려움을 겪었다. 새로운 도전 앞에 때로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자괴감도 들었고 때로는 '우리의 사랑이 식은 건가. 사랑이 식은 부부에겐 아이도 없는 건가.'라는 패배감도 느꼈다.

정말 노력하고 노력해도 실패한 날에는 세상에 내 맘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것처럼 서럽게 서로에 대한 원망감까지도 들었다.  


그래도 그것은 반드시 극복-극복이란 단어도 참 아이러니하지만-해나가야 했기에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나에게 있어 가장 성공한 방법은 이것이다. *서로의 성향을 파악해 우리 부부만의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냥 숙제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한 때 뜨겁게 사랑하며 연애했고 서로 붙어있어도 보고 싶어 했고 지금도 함께하면 행복한 우리가,

그 틈에서 발생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 관계를 숙제라는 틀에 욱여넣고 있었다.


그 틀을 풀어주고 자연스럽게 통통 튀어 다니게 내버려 두니 다시 함께 있는 것이 손을 잡고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이것이 100% 성공한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조바심에 오늘은 꼭 해야 하는데 하며 (상대방의 컨디션 상관없이)'일단 막무가내 전진!' 했다가 어색한 순간을 만든 적도 있고 그 시간은 다가오는데 그 날일리 알리 없는 남편이 하염없는 야근을 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방법을 계속 사용한다.

단, 처음 남편을 불러두고 각종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익힌 내용과 성교육 자료를 활용해 여성의 배란주기 그리고 수정과정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첫날 병원에 다녀온 뒤 넌지시 남편에게 병원에 다녀왔다는 정도만 알리면,  남편도 표현하지 않지만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말하지 않아도 조금 더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할까.. 자웅동체가 아닌 이상 혼자 해낼 수 없으니 함께 노력해야 한다.  


연애와 신혼 초, 즐겁고 좋았던 우리의 섹스는 책임감과 결의가 담긴 이 달의 의무가 되었다.

비록 예전만큼 이것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진 못하지만, 이달의 숙제를 남편과 함께 끝마치고  나면  '이번엔 꼭 엄마 아빠가 될 수 있을 거야!' 하는 새로운 기대감이 생긴다.


그리고 이번 달도 열심히 나팔관을 헤엄치고 난자를 찾아 나아갈 정자들을 상상하며

다시 한번의 희망을 갖게 된다.



엄마가 되는 것은 나만의 일도 아니고 남편의 일만도 아니에요.

나만큼 누구보다 아빠가 되고 싶어 할 남편과 함께 서로를 응원해주고 손잡아주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책임감은 시작될 거예요. 함께 노력해 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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