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연속면 Mar 15. 2022

전생에 소시민이었어서 좋은 것 하나

커피 중독자의 커피 조달기

세수를 안 하는 날은 3년에 하루쯤 있어도 커피를 안 마시는 날은 없다. 건강검진을 하는 날에도 검사가 끝나자마자 가장 가까운 커피숍으로 달려가 허겁지겁 커피를 들이붓는 카페인 중독자인 것이다. 36시간 동안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으면 두통 때문에 드러눕는 지경이 된다. 월요일 아침, 커피를 일단 한잔 마시기 전에는 동료들과 정상적인 의사 소통조차 불가능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 타나토노트』에 보면 인간이 환생할 때 전생의 잘잘못에 비례해 평생 안고 갈 병증을 고르도록 해주는데, 약한 치아와 만성 요통, 카페인 중독 정도에서 그친 걸 보면 전생에도 소시민이었나 보다. 지난번 건강검진에서 ‘카페인이 앞 두 개 병증에 아무 도움이 안 되’며, ‘(전생에 지은 죄가 아니라 현생에 얻은 잘못된 습관의 소산인 게 틀림없는) 미란성 위염도 악화시킬 수 있다’라는 전문가의 의학적 소견에 나는 주의김게 귀를 기울였다. 후천적 습관의 소산은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있다 하여 나는 매일 아침 한 번만 먹어야 하는 위장약을 처방받았다. “근데, 이 약은 커피를 마시기 전에 먹나요 마시고 나서 먹나요?” 내가 묻자 의사 선생님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질문에 약사 선생님도 묘한 표정을 지은 것 같은데 내시경 마취가 덜 깬 상태여서 기껏 처방받은 약을 버스에 두고 내린 것만 제대로 기억이 난다. 집에 와서 우선은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고 잠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카페인 중독자였는가 하면, 중독이 되기 전에도 이미 매일매일 마시고 있었으니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봤자다. 다만 서른 살이 넘고부터는 오후에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이 안 왔다. 이십 대에는 벤티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아침에 마시고 오후에 또 마셔도 멀쩡했다. 지금도 “난 아무 때나 커피 마셔도 잠 잘 오던데" 하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심지어 좀 억울하기까지 한데, 십수 년 전에는 지금처럼 저렴하고 마실 만한 에스프레소 커피가 널려 있지도 않았고 회사 근처에 있는 건 오로지 커피빈과 스타벅스였던 것이다. 학자금 빚을 이천쯤 떠안은 사회초년생이 그 커피값을 감당하기는 다소 버거웠다. 최근 동네—번화가가 아니다—에 에스프레소 바가 생긴 걸 보고 너무 멋있어서 마음속으로 물개박수를 쳤는데, 시간이 나지 않아 아직까지 가지 못했다. 출근 전 카페인 급속 충전을 할 수 있도록 회사 앞에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연유로 삼십 대 초반까지는 주로 커피빈을 애용했다. 그때는 커피빈에 ‘아이스 에스프레소’라는 끝내주는 음료가 있었는데, 얼음에 오로지 에스프레소 쓰리 샷을 탄 것이었다. 여름에 “샷 하나 더 추가요.”를 해서 출근하자마자 한 모금을 빨면 카페인이 머리를 때리고 온몸의 혈관으로 퍼지는 듯한 그 감각이 너무 좋았다. 주말에도 비좁은 방에 하루 종일 앉아 있기 싫어 테헤란로 근처의 커피빈이란 커피빈은 다 가봤는데, 여기서 읽은 수백 권의 책이 지금까지 나의 vocabulary와 사고력을 책임 지고 있다. 이직을 한 동네는 보다 저렴하고 맛도 괜찮은 커피숍이 많았다. 덩달아 나의 월급도 올랐으므로, 나의 사고는 자연히 “좋아, 커피값을 아낄 수 있게 됐어!”가 아니라 “그럼 음료를 더 마셔야지”가 됐다.


캡슐 커피 머신은 4년 전쯤에야 들여놨다. 그쯤에는 어디서 커피를 사먹더라도 커피값이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은 아니었고, 커피도 제공되는 회사에 다녔는데 공교롭게도 회사 커피가 맛없어서 내 책상에 두고 마시려고 커피 머신을 샀다. 네스프레소가 가장 보편적이지만 일리가 더 맛있어서 일리를 선택했다. 이 기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주위에도 선물했을 정도다. 그 회사를 관뒀을 때 기기는 집에 갖다 놓고 아침마다 텀블러에 샷을 내려서 (새 회사로) 출근했는데, 이것도 커피값을 절약하는 방법이라고 추천하는 경우가 있는 듯하지만 기기값을 뽕뽑으려면 생각보다 한참 걸린다. 캡슐 구매 비용과 관리 비용도 지속적으로 들어가므로 무시할 건 못 된다. 커피값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법은 그냥 커피 섭취량을 줄이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글렀다.


드립 커피의 세계에 발을 들인  현재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다. 이것은 공간의 문제로, 핸드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려면 드립퍼, 드립포트, 드립서버, 필터지, 그라인더, 뭐가 됐든  끓일  필요한데 7 남짓한 원룸에는 그걸  데도 차릴 데도 마땅치 않았다. 나는 스트롱 커피를 좋아해서 지금은 드립퍼가  개나 된다. 취향대로 마시고 싶으면 고노, 아이스 커피라면 하리오의 아이스 전용  드립퍼어떤 원두를 어떻게 내리건 상당히 깔끔하게 내려지므로 강력 추천—, 부드럽고 무난하게 마시고 싶을 때는 멜리타다. 드립 커피를 내리는 실력은 2020 하반기 장기 재택 근무 시절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유튜브를   보고 순서를 익힌 다음 커피콩에 수십만 원을 쏟아부으며 수십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몸을 써서 하는 일은 반복 연습이 답인  같다. 동시에 퀄리티를 높이려면 고퀄리티를 경험해 보는  필수다. 그러니까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실  있는데도 여전히 남이 내려준 커피도 꾸준히 마시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융드립에도 도전하고 있다. 한번 커피를 내릴 때마다 융을 삶으면서 “아, 이래서 융드립에 도전 안 하려고 했지 참” 하고 혼잣말한다. 그래도 맛은 상당히 좋아서 이제 웬만한 곳에서는 드립 커피가 내가 내린 것보다 맛없게 느껴진다. 또 비용으로만 따지면 핸드드립이 제일 비경제적인데, 도구 일습을 갖추고 좋다는 커피콩을 구하는 데 일단 적잖은 돈이 들고 마실 만한 걸 만들기까지도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까닭이다. 한잔 만들고 치우는 데도 시간이 걸려서 주5일 출퇴근하는 직장인은 평일에는 핸드드립을 내릴 엄두가 안 난다. 주말 양일에라도 내려 마실 수 있으면 다행이다. 드롱기 아이코나 커피 머신을 주전자와 세트로 맞추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를 때마다 ‘그걸 관리할 시간이나 나겠냐’라고 스스로 다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으면 친구가 놀러왔을 때 아인슈패너 만들어줄 수 있는데. 


그건 그렇고 ‘아이스 커피’라는 말은 참 좋지 않나. 누구는 그 단어를 들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누구는 냉커피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아이스 커피’라고 하면 강배전 원두를 진하게 내린 커피액에 시럽을 약간 타고 얼음을 잔뜩 넣은 것이 떠오른다. 원래는 커피에 물과 얼음 외의 것을 넣어 마시지 않지만, 그렇게 시럽 탄 커피를 교토에서 아주 맛있게 마신 기억이 있다. 교토의 여름은 몹시 더웠다. 쓴맛에 단맛을 그야말로 딱 1 티스푼만큼 얹은 커피가 더위와 피로를 기분좋게 식혀주었다. 그게 카메라와 기념품을 잔뜩 지고 돌아다니다 들른 이노다 커피 산죠 점이었나. 데라마치도오리의 스마트 커피였나. 그 도시만 여러 번을 갔는데 그것도 꽤 오래전 일이다 보니 기억이 뒤섞여 한없이 미화된 추억으로만 남았다. 일본에서 마셔 본 커피는 대체로 진해서 입맛에 맞았다. 여행지에서 피로를 잊기 위해 잠깐 들른 커피숍의 맛있는 커피 한잔, 언제쯤 다시 마실 수 있으려나. 올여름에는 시럽 탄 아이스 커피에 도전하려고 귀여운 컵부터 샀다. 그런데 딱 그때 그 맛이 나는 시럽은 또 어디서 구해야 한담.

매거진의 이전글 食. 당신의 집밥은 얼마입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