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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정 Feb 11. 2024

나를 인터뷰해보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본업


어쩌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퇴사해 공백기를 함께 보내고 있는 친구가 있다. 10대에 만나 서로의 꿈과 불안을 기억하는 오랜 친구.

백기라고 하기엔 공백이 담고 있는 텅 빈 느낌 없이 각자 자가발전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어 타이핑을 치고 나서야 우리가 보내는 시간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인생은 모두 부업일 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본업이다”

최근에 우연히 발견하고 저장해 둔 문장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본업에 충실한 시간을 지내고 있는 것이다.

커다란 불안 없이 삶의 다양성을 모색하며 비교적 건강하게 시간을 채워내고 있는 요즘, 나를 탐구하는 재밌는 설문을 발견해 재미 삼아 친구와 주고받았다.

설문에 답하며 너에 대해 생각하는 게 행복했다는 뭉클한 말과 함께 편지 같은 긴 답장이 보내져 왔다.


내가 고른 단어들 속에서 친구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고작 단어들일 수도 있는 짧은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말아쥐었다. 사랑을 꼭 사랑이라 말하지 않아도 사랑인 것처럼 평범한 얼굴을 한 단어 속에 누적된 세월이 묻어나면서 나는 그걸 쓰며 스쳤을 다양한 감정의 얼굴들을 읽었다.


저 김병국은 85세입니다.
전립선암으로 병원생활을 한 지 일년이 넘었습니다.
병세가 완화되기 보다는 조금씩 악화되고 있습니다.
전립선암이 몸 곳곳에 전이가 되었습니다.
소변 줄을 차고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습니다만 정신은 아직 반듯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을 때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 장례식에 오세요.
죽어서 장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손을 잡고 웃을 수 있을 때 인생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화해와 용서의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고인이 되어서 치르는 장례가 아닌 임종 전 가족, 지인과 함께 이별 인사를
나누는 살아서 치르는 장례식을 하려고 합니다.
검은 옷 대신 밝고 예쁜 옷 입고 오세요.
같이 춤추고 노래 불러요.
능동적인 마침표를 찍고 싶습니다.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설문지 답을 읽어 내려가다가 김병국 님의 살아생전 장례식의 직접 쓴 부고장을 보고 마음이 설렜던 기억이 떠올랐다.
검은 옷 말고 밝고 예쁜 옷을 입고 와 춤추고 노래하자며 용서를 빌고 화해를 하고 감사하며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는 진심이 죽음이라는 무게를 이기고도 남을만큼 묵직했다.

나도 죽는 순간을 예상할 수 있다면, 그런 축복을 받고 떠날 수 있는 행운이 온다면 평생을 다 합쳐 가장 기쁜 날로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다 생각한다. 어떤 식의 결말이든.

내가 김병국 님의 스스로 쓴 부고장을 떠 올린 건 아마 그 인터뷰지의 마지막 질문 때문이었다. 

- 당신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요?

누적된 세월에 켜켜이 쌓인 감정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르고 고른 말속에 후회는 없지만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 정녕 본업이라면 이 친구가 평생 본업을 함께 할 사람인 것은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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