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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정 Feb 04. 2024

불안함과 공허함은 꾸준함으로 밀어냅니다

무기력을 이길 루틴

어떤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자유를 선사하는 동시에 불안을 가져오기 마련인 걸까. 얼마동안 자유를 만끽했었나. 잔잔한 여유가 넘치는 일상 속에 배움과 루틴을 부지런히 실행하면서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아도 좋겠다'는 충만함에 젖어 있을 때쯤 이 만족도 높은 생활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인생이 곡선처럼 유연하게 흐르면 좋으련만 예고도 없이 갑자기 꼭짓점을 찍고 수직으로 꺾이거나 낙하하거나 급회전을 해대니 나의 불안도 평온하던 어느 날 어느 시에 불현듯, 갑자기 찾아왔다. 


지난주 일요일, 해외에 있는 전 직장 동료로부터 보이스톡이 걸려왔다. 요즘 뭐 하냐는 형식적인 질문 뒤로 한국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잠깐 도와줄 수 있냐는 연락이었다. 일정 기간 동안 업무량도 페이도 나쁘지 않고 꽤 흥미가 생기는 제안이었는데 없던 일정을 만들어 거절해 버렸다.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조금 간절한 부탁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당장 다음 달부터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으면서 나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전혀 미련이 남지 않는 결정이었다. 그만큼 지키고 싶은 루틴이 있었고 오염시키고 싶지 않은 계획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확신들 때문에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이 되지 않아 불안의 파장이 한도 없이 치솟은 것은 정말로 의문이었다. 저번 주와 다른 이번 주의 변칙적 이벤트가 있었다면 겨울이 가는 듯 풀린 날씨에 즉흥적으로 다녀온 1박 2일의 짧은 여행과 1년에 어쩌다 한 번씩 만나는 친구들과의 약속 한 번 정도였다. 오랜만의 여행은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것처럼 활동력을 높여주었고 실내인간처럼 단조롭던 일상에 확실한 환기구가 되었다.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 약속 때문에 발생해 앞으로의 계획들에 돌연한 의문을 가져왔다. 


각기 다른 시기에 저마다의 이유로 퇴사한 3명의 직장인들과 1명의 휴식 중인 프리랜서. 

백수모임을 자칭하며 만난 친구들과의 모임이었다. 그중 1명은 작년 7월 이후 오랜 공백을 깨고 첫 출근하는 날이라 모임에 가장 늦게 합류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 주제는 '일'이 되었다. 공백기가 가져다주는 큰 장점 중에 하나는 일에 대한 재정립과 재정의를 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비슷한 고민과 탐구를 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정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화 저변에 '일=밥벌이'라는 것에 대한 모종의 합의 같은 것이 있었다. 아마도 바로 그 지점에서 공허함이 찾아온 것 같다. 


친구들과의 그 대화를 통해 생계에 대한 책임감이 각성되면서 무소속에 대한 불안과 경제적 성과가 없는 나의 활동들이 모두 무용한 움직임처럼 느껴져 버린 것이다. 대가 없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루틴의 중요성을 앞선 적은 처음이라 이 당혹감이 나를 몇 달간 접속하지 않던 취업 플랫폼을 기웃거리게 하고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과 즐거운 탐구생활을 막아서는 것 같았다. 


이럴 때를 예상하고 마련해 놓은 대비책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무기력에 잠식되었다. 잠시동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계획한 일상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나를 둘러싸고 있어 집안 곳곳에 시각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거실에 앉으면 보이는 냉장고 문에 붙은 체커보드, 테이블에 놓인 플래너 속 투두리스트, 무기력 속에서도 하루의 마무리 시간으로 꼭 써 내려가던 일기장이 나를 다시 일으켰다. 목적한 바 중에 하나도 이룬 것이 없는데 무엇에 쫓겨서 어렵게 마련한 이 시간을 허망하게 끝내버리려 했는지. 


다시 이전처럼 확고해진 마음으로 시간에 정성을 쏟는다. 정해놨던 계획을 하나씩 실행하면서 누적과 적립의 힘을 믿어본다. 이따금 이렇게 불안해질 때를 대비한 루틴도 마련해 놓으려고 한다. 갑자기 찾아온 것은 갑자기 사라지기 마련이다. 소소한 일들로 공허함을 채우니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마음이었구나 알게 되었다.  수조에 거품을 채워놓고 그릇을 반짝거리게 닦는 일이나 샤워를 하고 향이 좋은 바디오일을 바르는 일들이 나를 가벼워지게 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나 지극히 작은 일들로 씻겨져내려 가다니, 물기를 닦으며 생각한다. 내 불안은 이토록 유약한 수용성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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