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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Dec 31. 2020

비디오 플레이어

내가 알던 사람, V와의 기억

 내 기억에 남아있는 최초의 우리 집은 반지하에 작은 방이 세 개인 집이었다. 언덕길 끄트머리에 있는 집이어서 그랬는진 몰라도 반지하 집이지만 집 대문 반대편 창문을 열면 우리 집이 진짜 지하에 있는 집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마가 혼수로 들여놨던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로 꽉 찼던 작은 방 창문을 열면, 창 밖으론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 아랫동네 집들의 지붕들과 평평한 옥상, 그리고 탁 트인 하늘과 바람이 있었다. 창문에 달아둔 커튼이 흔들거릴 때 가끔 엄마가 피아노를 치셨다.

 우리가 살던 곳이 보통 달동네라고 말하던 그런 동네였을까? 그래도 아주 살기에 힘들 정도로 형편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V는 내 기억 속 최초의 동갑내기 친구였다.

 우리들의 부모님은 같은 교회를 다니셨고, 우리는 일요일 오전마다 어린이 예배에 결석 없이 꼬박꼬박 참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의 집을 스스럼없이 오갈 정도로 친해지게 된 큰 이유엔 사실 교회보다는 유치원이 더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우리 집이 있던 그 언덕길을 끝까지 올라가면 그 너머엔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다. 그 학교 옆에 붙어있는 병설유치원에 우리는 나란히 입학했다. 소꿉놀이를 하기도 하고, 동화책을 보기도 하고, 어떤 주말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려 운동회를 했던 기억도 난다.


 우리는 가끔 서로의 집에 놀러 가곤 했다. V의 부모님은 낮에 종종 집을 비우셨는데, V에게 두 살 많은 오빠가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유치원이 끝나고 나와 V는 우리 집엔 없는 만화영화 비디오테이프를 보려고 V네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 날은 V의 오빠도 어딜 갔는지 집에 없었다. 나는 TV가 있는 방향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V가 만화영화를 틀어줄 때까지 멀뚱히 V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우리 집이었다면 내가 했을 일이지만, V의 집이었기 때문에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평소와 무언가 달랐다.


 V는 TV가 올려져 있는 장 뒤편으로 몸을 뻗어서 비디오 플레이어의 코드를 콘센트에 꼽고, 비디오 플레이어에 비디오테이프를 넣었다. 분명 그렇게 하면 지지직거리는 TV의 화면과 소리가 멈추고 만화영화가 곧 시작될 것임을 보여주는 파란색 화면이 브라운관에 비쳐야 했다. 그런데 화면은 우리의 예상처럼 바뀌질 않고, 갑자기 꺼져버렸다. V와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뭔갈 잘못 만져서 TV와 비디오 플레이어가 폭발하면 어떡하지?"

 

개연성 없는 생각이었지만 6살짜리 꼬마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엔 충분했다. 나와 V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그 집에서 뛰쳐나왔다. 겹겹이 세워진 집들 사이로 미로 같은 골목골목을 빠져나와서 안전한 우리 집에 도착했다.


 V는 우리 집 두툼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서도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들을 걱정했다.

 정말로 우리 집이 폭발하면 어쩌지? 엄마 아빠가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 TV가 터지면 어떡하지? 오빠가 혼자 집에 왔는데 비디오 플레이어가 폭발하면 어떡하지? 우리 가족들이 다 사라지고 우리 집까지 없어지면 어떡하지?


 V 염려들이  일리 있단 생각하나하나 같이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차근차근 변압기의 버튼과 컴퓨터 전원 버튼, 컴퓨터 모니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컴퓨터가 켜졌고, 나는 아빠가 조금만 하라며 가져오셨던 게임 CD 컴퓨터 CD롬에 넣었다.

 평소 V의 오빠가 하던 비디오 게임과는 많이 다른 종류이긴 했지만, 마우스를 끌어다가 클릭해서 모니터 화면에 뜬 예쁜 얼굴 인형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화장을 해주는 게임은 재미있었다.


 나와 V는 같이 한참을 그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우스를 번갈아 주고받으며 게임을 했고, 저녁 먹을 때쯤, V의 엄마가 V를 데리러 우리 집에 오셨다.

 비디오 플레이어가 폭발하거나 그런 일 같은 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 아빠는 다른 동네 학교로 발령을 받으셨다.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게 됐다. 이사를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병설유치원에 가던 날, 나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 그동안 내가 교회에서 상품으로 받아서 모아뒀던 학용품을 조금씩 나눠주었다.

 V에게는 특별히 내가 아끼고 좋아하던 동그란 연필을 몇 자루 더 쥐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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