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안 들은 귀 삽니다
병원에서 돌 맞은 병든 개구리
죄책감과 무기력과 두려움이 버무려져 병원에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가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받아올 약도 무서웠다. 지난해 공황증상으로 받았던 약도 무서워 다 먹지 못하고 서랍장 어디엔가 두었다. 알약으로 기분과 수면이 바뀐다는 게 무섭고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멀쩡했던 건 아니었다. 갑자기 명치가 답답해졌다가, 머리가 아팠다가, 호흡이 짧았다가, 몸살이 난 것처럼 온몸이 쑤시기도 했다. 술병인 줄로만 알았던 증상들은 맨 정신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우울하고 힘들었던 건, 길을 가다가 혹은 지하철에 서있다가 느닷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상한 내 모습이었다. 맞은편 사람이 나를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눈물을 닦지도 않고, 자리를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눈물을 흘려보내는 슬프고 괴상한 나.
죽을 거 아니면, 이제는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지도앱에 검색을 해서, 집 근처의 병원들에 전화를 돌렸다. 가장 빠른 날짜에 진료가 가능한 곳으로 예약을 한 뒤 병원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고 무섭지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진료가 바로 가능한 데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낡은 소파와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오래 근무한 듯한 중년의 간호사와 할아버지 의사가 운영 중인 오래된 병원이었다.
할아버지 선생님은 부모님의 직업, 언니와 동생의 직업, 나의 출신 대학과 전공 등을 물으며 호구조사를 이어갔다.
지도앱 리뷰에 대학교를 물어 불쾌했다는 환자의 리뷰도 있는 걸 보니, 초진 환자들에게 하는 기본적인 정보 수집인 듯했다. 이전에 갔던 병원 선생님은 감정과 상태에 대한 질문만 했었는데, 여기는 좀 다른 스타일인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자세하게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게 더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기대하며 착실히 대답했다.
몇 가지 내 상태에 대한 질문을 더 한 뒤, 선생님은 테스트를 해보자고 했다. 손녀 대하듯 반말을 하는 선생님 말투가 외할아버지랑 비슷해 마음이 좀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300문항이 넘는 질문지와 음주 관련 설문지가 주어졌다. 빽빽하게 적혀있는 종이를 보니 왠지 재밌게도 느껴졌는데, 어떤 질문들은 도덕 시험을 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대한 솔직하게 답하고 최선의 치료를 받는 게 내 목표였기 때문에, 성실하고 꼼꼼하게 답을 적어 내려갔다.
한참의 대기가 끝난 뒤 진료실로 다시 호출됐다.
"우울하고 불안함이 대부분이네. 일단 약을 좀 먹어보자."
선생님이 적어준 종이를 들고 간호사에게 갔다. 간호사 아주머니는 약을 준비해 상담 테이블로 나를 데려가, 법륜스님의 즉문즉답 브로셔와 약을 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살다 보면 이거 별 일 아니야. 진짜별일 아니야.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리고, 손이 바쁜 게 최고라니까? 일을 바쁘게 해야 돼."
그러니까 지금, 별일도 아닌 일에 이렇게나 우울에 빠진 나약한 인간이라는 뜻이야?
충격요법인가? 상담의 기술 중 하나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이 병원이 우리나라 최고의 정신과라고 해도, 내가 깊은 우울증에 걸려 식음을 전폐하게 됐다고 하더라도 다시 나를 고치러 여기 오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300개가 넘는 수많은 질문을 답한 결과가 이거라니. 그리고 이어서,
"일은 하고 있어요? 아.. 쉬고 있어?" 반쯤 감은 눈으로 말하는 그 얼굴은, '음.. 아무리 그래도 젊은 애가.. 일을 안 하는구나..'라고 읽혔다. 그게 흐름상 맞는 해석이었다.
나는 도대체 뭘 기대하고 간 걸까. 자신의 인생 방식에 대해 쉴 새 없이 늘어놓는 간호사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아득하고, 나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더 이상 듣기 힘들어질 때쯤, 약에 대해 물었다. 내성이 생기지는 않을까, 증상이 없어도 먹어야 하느냐고.
"응. 일단 먹어요. 이거 먹어보고 그다음은 선생님께서 알아서 판단해 주실 거예요. 습관성이 있는 약이긴 한데, 선생님이 판단해서 줄이든지 늘리든지 하고요."
하고 더 말을 이어가기 전에, 아, 넵넵. 하고 자리를 일어서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왔다. 인생 최초로 악성 리뷰를 남기고 싶어지는 병원에서 받은 약은 당연히도 먹기 싫었다.
조언이 아니라 병원이 문제였을 건데, 애꿎은 생각이 들었다.
누구야? 힘들어지면 병원에 가보라고 한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