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는 번화가에서 30분가량 걸어가면 나오는 해변이 있다. 이름도 예쁜, 바르셀로네타 해변. 구글맵 지도로 쭉 걸어 나오니 정말 해변이 펼쳐졌다. 날이 선선해서 그런지, 오후 3시가 넘어 그런지 물놀이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저 멀리 움직이고 있는 하얀 돛을 단 요트들은 대충만 봐도 30척은 넘어 보였다.
모래사장 옆쪽으로 촘촘히 쌓아 올려진 바위 위에 사람들이 앉아 사색을 즐기고 있었다.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시원한 바람과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가 ASMR처럼 포근했다. 햇살도 따뜻해 잠이 올 것 같은 그때, 파도 위로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공황 증상으로 처음 정신과에 간 날, 남자친구는 약이 든 봉지를 들고 달달 떨고 있는 나를 동네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소갈비집으로 데려갔다. 밥이 도저히 안 넘어간다니까, 그럼 딱 세 개만 먹으라며 입에 한 개씩 넣어 주고 "약은 일단 한번 먹어보고, 안 들으면 다른 병원도 가보자" 며 언니 집에 나를 내려주고, 자기가 미안하다며 애꿎은 본인을 탓했다.
나를 크게 괴롭히는 기억들 중 하나이긴 하지만, 수많은 기억 중 갑자기 왜 그 기억이 난 걸까? 그건 내 독립 역사의 시작이자, 자유로운 연애를 시작함으로써 그의 진가를 알게 된 계기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본가에서 셰어하우스로 나온 가장 큰 이유는 마음속에 곪아터진 일들이 많아서였다. 본가 때문이 아니라 모두 내 마음의 문제였다. 평생을 살아온 편안한 곳을 나오니 살기가 바빠 그런지 본가를 나온 뒤 증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남자친구에게 나도 모르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심플하고 시원하게 사는 그가 부러웠고, 닮고 싶었다. 내가 생각을 복잡하게 하면 잔뜩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어주.. 는 타입은 아니고, 아예 불태워주던 사람이었다.
여기서부터가 지옥의 시작이다. 좋았던 기억들이 머리를 휘감고, 현실과 꿈을 혼동하고, 이미 간 사람을 기다리고. 이건 그리움이 고여서 썩은 집착이었다. 기다리면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좋은 추억만을 곱씹으며 인생의 의미를 잊어가고 있었다. 이 감정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스스로 빠져나와야만 한다. 썩어버린 집착을 잡을 수만 있다면 잡아 바다 저 멀리 날려버리고 싶었고, 이미지 트레이닝처럼 상상으로 있는 힘껏 던졌다.
두 번째 떠오른 집착은, 현재 나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 이 먼 여행을 함께 하게 된 비운의 지인. 비슷한 결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거의 반대의 성향에 가깝다는 걸 최근에서야 느꼈다. 누가 그렇게 생각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 혼자 착각을 하고 오해를 한 것이다. 관계가 더욱 깊어지리라 생각했던 여행이, 이것 또한 혼자만의 생각이고 왠지 슬프게 막을 내리게 될 것 같았다.
언젠가 오은영 박사님이 티브이에 나와 같은 반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친구는 아니라는 말을 했던 게 생각났다. 정말 친한 사람들과 친구를 하고 마음을 주고받고, 나머지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 나는 다 친구 하고 싶은데, 친절함과 다정함이 무기인 나의 과한 욕심이었다.
마음을 넓게 쓰자는 다짐을 하고 왔지만, 선을 긋는 것 같은 행동들이 자꾸만 서운하고 상처가 됐다. 1년 남짓 알고 지낸 사이에 불편하면 그럴 수도 있는데, 아니 아무 생각 안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인정이 안 됐다. 모두가 편하게 대화를 걸어오는 나인데. 내 기준에선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감정에 대한 대화도 선을 긋고, 내가 신경 쓰는 것도 불편해하고. 이럴 거면 왜 같이 여행을 왔지?
여기엔 오류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내 기준'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사람과 관계를 이어나갈 때 상대도 나도 가장 답답하고 무기력해질 수 있는 것. 반성하고, 내려놓아야 내가 커질 수 있다. 아니, 걸림 없는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두 번째는 오만함이었다. 내 특성을 간파하고 일부러 편하게 대화를 걸어오는 타인의 고차원의 배려도 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 그런 거라고 착각을 하고 사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여태 하지 못했다. 겸손하게 살아야 마음이 평온할 수 있다.
다시 썩은 마음을 구겨 윤슬이 가득한 예쁜 바다에 던졌다. 포기의 마음인지 정말 집착을 내려놓은 마음인지는 나중이 되어봐야 알겠지만, 당장은 숙소 앞 바에서 와인이나 마시며 지금을 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