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텐스로그] 영화 <플랜 75>와 노년의 죽음에 대하여
최근 한 독서모임에서 '죽음'과 '노화'를 주제로 함께 책을 읽었습니다. 불혹 언저리의 연령대로 구성된 모임이라 그런지 활발한 대화가 오갔는데요. 가는 데 순서 없다지만 그래도 우리가 평균 수명만큼 산다면 우리의 노년은 어떤 모습일지, 우리가 원하는 죽음은 무엇인지 상상과 바람을 나눴습니다.
'죽음'과 '노화'를 생각하다 보니 관심 목록에 올려두었던 영화 <플랜 75>가 떠올랐습니다. 기사로 먼저 접했던 일본 영화인데요. 정부가 75세 이상 노인들에게 합법적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안락사'로 지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료로, 아니 심지어 마지막 남은 시간 동안 쓸 돈을 줘가면서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라니, 주체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령화가 심화된 사회, 복지 예산을 감당하기 어렵고 노인 대상 혐오 범죄까지 빈번해지자 일본은 불안한 노년을 위하는 척 허울 좋은 정책을 만들어 사실상 노인들에게 국가를 위한 죽음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고령화(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 이상) 사회를 앞서 살고 있는 일본이 결국 이런 영화까지 만들어 버린 것이죠.
영화에는 복지 공백으로 갈 곳 없고, 살 길 없어진 노인들과 친절하고 상냥하게 죽음을 안내하는 플랜 75팀의 공무원들이 등장합니다. 불안이 가중되고 혐오는 짙어지며 인간성도 쉬이 상실되는 오늘날에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 정곡을 찌르며 묻는 가슴 아프고도 탁월한 영화이지요.
기이하지만 소름 끼치게 눈앞의 현실 같기도 한 영화를 보고 나면 여운이 깁니다. <플랜 75>를 연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다 그가 가진 정확한 문제의식에 무척 통감했습니다. 꼭 고령화 이슈에만 국한되는 통찰도 아닌 것 같습니다.
"<플랜 75>는 안락사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었다. 일본에서도 안락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나이 듦에 대한 불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방향이 아니라, ‘힘드니까 죽어야지’라는 생각이 우선시 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인간의 생사를 너무나 간단히, 쉽게 선택하는 그런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이 든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일본의 사회학자이자 여성학자인 우에노 치즈코는 저서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를 통해 '1인 재택사'를 전파합니다. 홀로 사는 노인들의 죽음을 '고독사'라 부르는 부정적 인식 그리고 노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골칫거리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죠. ‘1인 재택사'에 동의하는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결정하고 준비합니다.
우에노 치즈코는 EBS 다큐멘터리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2부 - 집에서 죽겠습니다' 인터뷰에서 의료인이 집에 방문해 환자를 보살피는 '간병 보험' 등을 활용하면 시설이나 병원에 가는 것보다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밝힙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오히려 간병 보험의 개인부담률을 10%에서 20%로 늘려 보장률을 축소하려 하죠. 영화 <플랜 75>가 꼭 허구만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간병 보험 축소를 반대하는 이들은 돌봄 종사자의 처우 개선도 촉구합니다. 처우가 나빠 노인 돌봄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플랜 75>에서도 요양 시설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필리핀 외국인 노동자가 등장합니다. 우리에게도 더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죠. 한 돌봄 노동자의 발언은 초고령화 사회에서 돌봄 노동이 더 대우받아야 할 중요한 까닭이었습니다.
"서로의 약점을 돌보며 돌봄 현장에서 싹튼 친절함. 이 친절함이야말로 시대를 넘어 점점 퍼지면서 인간을 성장시킨다고 지난 30년간 (돌보는) 일을 해오면서 느끼고 있습니다."
부모 세대를 돌보는 게 부담스러운 자녀 세대와 다음 세대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부모 세대. 저도 자녀이자 부모로 이 사이에 끼어 불안하고 갈등합니다. 생각해 보면 두 세대가 원하는 것은 같은데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어쩐지 죄책감과 절망감을 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EBS 다큐멘터리는 의료기관과 주민들 서로가 서로를 챙기는 시스템과 협의체를 마련한 마을을 소개하며 끝을 맺는데요. 나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고 준비하는 주체적인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고립이나 가족의 희생이 아닌 정책적・사회적 돌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물론 죽음을 완벽하게 계획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삶은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데다가 저출생・고령화 위기라는 난제에 수박 겉 핥기 식의 대책만 내놓는 정부를 보며 나를 지키는 주체적인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죠.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방향'을 얘기한 <플랜 75> 감독의 말처럼 결코 죽음과 삶은 별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비슷한 생각에 이르렀을 우에노 치즈코의 문장을 마지막으로 남깁니다.
"죽음을 우리가 정할 수는 없으니 죽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가자는 거예요. 결국 제가 해온 연구는 ‘죽는 방법'이 아닌 ‘사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Written by 하루하루 노화를 체감하며 노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 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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