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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ree Baik 애리백 Feb 16. 2020

제3화 공감의 힘은 영역이 크다

지혜를 나누어주는 사람 H 씨

그때 나는 오랜만에 H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주말에 같이 브런치 할까. 회사 밖에서 보자.’


회사 복도에서 이따금씩 마주치는 그와 평소처럼 농담할 기력도 없이 나와 내 주변의 문제들로 골치 아픈 시간들을 거치고 있던 중이었다. 생기 잃은 내 얼굴을 그는 확인했지만 캐묻지 않았다. 나는 나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걸어 다녔고 사람들과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먼길을 돌아가곤 하던 시절이다. H와 이따금씩 형식적인 안부만 주고받는 동안 몇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부서장에게 전달한 상황들, 병원에서 받은 기록, 동료들과 증인들과 함께 한 수많은 상담, 인사과 면담, 회사 노조의 도움, 제출한 수많은 보고서와 증언의 내용이 다행히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았고 나는 인사과의 개입을 통해 임시적으로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나를 향하던 ‘직장 내 괴롭힘’은 잠시 멈춰졌다. 몇 달 만에 H에게 연락을 할 심적 여유가 조금 생겨났다.


사람들은 마치 잘게 조각낸 색종이를 가득 넣은 커다란 풍선을 들고 다니며 언제든 폭죽을 터뜨릴 요량으로 타인과 눈만 마주치면 너무 많은 말들을 떠들어댔고, 나는 그들에게서 최대한 멀리 도망쳐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소음과 루머에서 빠져나가 살았다. 이미 생각을 방해하는 언어들이 머릿속에 충분히 많았다.


오랜만에 H와 만난 토요일은 푸른 나무 잎사귀가 서로에게 스치는 소리만 들리던 그저 평화롭고도 눈이 부신 날이었다. 깨끗하고 화창한 여름날이었다. 그와 나는 고요한 레만 호수를 마주하고 벤치에 나란히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네바를 벗어나 베르수아의 호수는 더욱 투명하고 조용했다. 나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괴로운 시간들로 매일이 참기 힘들었는지 털어놓았다.


가혹했던 부서장의 인사 경영, 보고 체계마다 증언을 하고 설득을 해가며 지탱해온 시간들, 무엇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가, 큰 고민의 소용돌이 속에서 매일 아프게 시간을 날려버리고 다음날 회사를 출근하는 길이 얼마나 죽을 맛이었는지. 그게 사실상 영혼의 속살이 가만히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 와중에 나를 발견해주고 성심을 다해 현실적인 도움을 주었던 동료들이 있었다는 기적을.


“같은 얘기를 회사 윤리 담당관, 인사 책임자, 노조 위원장, 조력자 동료들한테 반복해야 했잖아. 처음에는 그 괴로운 얘기들을 하고 또 하는 게 정말 고역이었어. 나는 계속 억울한 감정이 올라온 채로 지속해야 하는 거니까. 그동안 어떤 식의 부당한 일들을 당해왔는지 내가 현재 얼마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는지, 건강까지 망가졌다고, 증언을 시작하고 또 반복하는데 처음에는 장황하고 감정을 앞세운 이야기로 진술하게 되더라고. 그런데 가면 갈수록 더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요약 진술을 하는 나 자신에게 아주 놀랄 지경이었지 뭐야. 난 이제 요약의 달인이 되었어. 하하.”


마음이 편해졌는지 이제 슬슬 농담이 나왔다.


“그런데 그동안 얼마나 지쳤는지 그렇게 좋아하는 여행을 떠나서도 아침 늦게까지 도저히 몸이 안 일어나 져서 아까운 조식 시간을 놓치는 무시무시한 일이 내게 벌어졌다는 게 믿겨? 다 늦게 호텔 식당 주방에 가서 빵 한 조각만 달라고 애걸했다 이거다.”


길고도 길게 나의 이야기를 쏟아 놓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고, 내 목소리를 가로막거나 함부로 반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내 차례가 온 듯 풍선 속의 색종이를 흩뿌리듯 얘기가 터져 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묵혀놨던 이야기를 지속하면서 서서히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를 바라볼 때마다 안타까운 눈빛만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H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마디를 얹지 않고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이제 해피 엔딩만을 남겨두고 있었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약간의 웃음과 너스레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나와 매번 농담 배틀을 하는 H가 아닌가. 그의 앞에서 눈물바람을 쏟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지금껏 조용하던 그가 드디어 천천히 말했다. “너의 이 모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


 문장이었다. 순간 멈춤 상태로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고요하게 빛나는 눈으로 미동도 않고 경청하던 그가 말한   문장.


그의 조심스러운 이 말 한마디가 내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 찰나에 상상하기 힘들 만큼 마음이 차분해졌다. H는 내 한 마디 한 마디를 깊이 이해해 주고 있었고, 공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의심받지 않는다는 안도감에 크게 안심했다. 최대한의 논리와 감정을 있는 힘껏 동원해서 내가 옳다고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되는 이 순간이 왔구나, 지금까지 애썼던 일들이 마치 반절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섣불리 조언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누군가의 깊은 이해가 이 일의 종착을 그 환한 호수 앞에서 알려주는 것 같았다.


‘너의 감정은 정당하다’고 말해주는 그의 눈빛에 나는 긴장이 풀렸다. 검증하려들지 않는 계산 없는 경청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때 나는 내가 계획하는 해피 엔딩에 생각보다 일찍 가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불안정했던 마음과 억울함이 조금씩 분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래전 H가 심리적 위기를 겪고 나서 입을 다물어 버린 사연은 훗날 자신의 이야기를 어렵게 풀어놓는 나에게 좋은 공감자가 되어 주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 그를 앞에 놓고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가 지금껏 알리지 않았던 그의 아픔과 상처를 듣는 동안 나의 태도는 어땠을까. 원형을 훼손하지는 않았을지 염려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가끔씩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마치 타인의 사연인 것처럼.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 준다면 어떤 얘기를 해주겠어?” 곧장 답이 온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겠어. 지금까지 자신이 만들어온 기쁨의 순간들, 작은 성취들을 하나씩 충분히 회상해보라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왔고 뿌듯한 일들이 많이 만들어 왔는지. 좋은 기운이 올라오는 게 느껴질 거야. 애리,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해.”

기껏 내 얘기가 아닌 척했어도 소용이 없었다.


오늘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때의 에피소드를 회상하며 H에게 물었다. 당시의 네 반응은 나에게 큰 안심이 되었다고, 그걸 알았느냐고. 별일 아니었다는 듯 대답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그 날의 이 순간을 매우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너는 이미 해결책을 찾아가던 중이었어. 자신에게 적합한 답을 알아내고는 네가 힘들었던 감정을 이제 놓아주려던 순간에 나는 옆에 있었던 것뿐이야.”


타인에게 성급히 조언하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잔잔한 대답을 나는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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