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eer
드디어 내가 두려워하던(?) 그런 날이 왔다.
일이 없는 날.
통번역대학원 마지막 학기 막바지였던 지난달, 나는 졸업시험이라는 무시무시한 최종 난관을 앞두고 있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다가 문득 ‘일을 많이 할수록 학업에 소홀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졸업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당분간 에이전시를 통해서나 개인적으로 들어오는 일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기반을 다지겠다고 무리하게 일하다 학위 수여를 못하는 불상사를 겪을 수는 없었다.
시험에 떨어져 재시험을 보는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 무엇보다 졸업이 우선이지.'
그런 판단 하에 들어오는 일을 거절하기 시작했는데, ‘이러다가 나중에 일이 안 들어오면 어쩌지'하는 생각에 은근히 불안했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거절할 때는 중요한 시험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최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시험만 끝나면 일 많이 해드릴게요." 하고 덧붙이며.
그때 일을 거절한 여파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걸까.
바쁠 때는 그렇게 한꺼번에 일이 몰리더니, 한가할 때는 왜 이렇게 일이 없는건지 모르겠다.
프리랜서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일이 없는 것 아닐까.
뭐, 이때가 기회라며 태평하게 '자유 시간'을 즐기는 프리랜서도 있겠지만,
시간이 많으면 걱정을 사서 하는 나 같은 프리랜서에게 일이 없다는 것은 (아직은)두려운 일이다.
'설마 그때 거절했다고 거래처 리스트에서 내가 삭제된 건 아니겠지?'
'이렇게 오래 일이 없었던 적이 없는데, 무슨 일이지.’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한번 연락해서 이제 시간 많으니까 일 좀 달라고 얘기해볼까.'
등등......
시간이 많으니 참 별 생각이 다 든다.
사실, 따져 보면 해가 바뀐 지 얼마 안 되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말이었다.
크리스마스며, 신년이며, 공휴일이 많았으니 일이 좀 없을 수도 있다.
뭐, 이유야 무엇이든, 지금 일이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또한 다 경험이라고, 이것도 한 철이려니 하고 생각하며 애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다.
그랬더니, 처음에 들던 쓸데없는 걱정도 조금씩 사라지고 점점 이런 생활에 적응되고 있다.
나만의 '일 없는 시간' 보내는 방법이 나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한번 공유해보고자 한다.
요 며칠, 아니, 몇 주간 내가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걸 봐서는 영 틀린 방법은 아닌듯하니,
일이 없어 마음이 괴로운 프리랜서가 있다면 이 글이 그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일이 없을 때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1. 친구들 만나기 (인맥 유지하기)
나는 일이 많을 때는 친구를 만나도 마음이 불편해서 대화에 잘 집중하지 못하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여유가 없거나 바쁠 때는 친구들을 잘 만나지 않는 편이다. (이렇게 적고 나니 친구들에게 미안하네.^^;)
대신, 요즘처럼 시간이 많을 때는 친구들에게 만나자고 열심히 연락을 해서 함께 식사를 하거나 시간을 보낸다.
친구들을 만나면 좋은 점은, 무엇보다 그들을 통해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이다—그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해도.
특히 나는 친구들로부터 생활 면에서 소소한 팁을 많이 배우는데
가령, 요즘 어디서 뭐가 세일한다더라 하는 '알뜰 쇼핑 팁'이라든지(프리랜서의 알뜰 소비에 필수!)
인기 있는 어플이나 아이템은 뭐더라 하는 트렌드(센스 있는 트렌드 감각 또한 프리랜서가 꼭 갖춰야 할 덕목이다)소식 등을 배울 수 있다.
또 한 가지. 때로는 친구들을 통해 일거리를 받게 되기도 한다.
플로리스트 친구를 통해 유명 플라워 샵에서 외국인 수강생들에게 플라워 레슨을 통역하게 된다든지.
알고 보니 중소기업 사장 딸인 친구로부터 기업 회의 통역을 의뢰받는다든지.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한 후, 생각지 못한 지인들로부터 통번역 의뢰를 받은 적이 꽤 많다.
일거리를 받겠다는 의도로 친구를 만나라는 말은 아니지만, 때로는 우정이 훈훈하게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러니 친구와의 관계를 절대 소홀히 하지 말고, 시간이 있을 때 직접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을 적극 권장한다.
게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나.
2. 운동하기 (건강 관리하기)
나는 어릴 적부터 체력이 많이 약했던지라, 항상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고 있다.
평소 일이 바쁠 때는 워낙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서 마음속으로만 ‘운동해야 하는데 어쩌지’하며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그래서 시간이 많을 때는 무조건 운동을 한다.
가까운 동네 헬스장이 가장 가기 편해서 한가할 때 자주 이용하는 편이고, 가끔은 큰 마음먹고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동네 스포츠 센터에서 매트 필라테스 수업을 등록했다.
평소에 안 쓰던 근육, 안 하던 자세를 하며 내 몸을 마구 괴롭히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머리를 많이 쓰는 만큼 몸도 많이 쓰면서, 정신과 육체 건강의 밸런스를 유지해야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것 같다.
3. 부수입 창출하기 (금전적 불안감 해소하기)
프리랜서가 일이 없을 때 불안한 것은 아마 금전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매달 생활비는 줄어들지 않고 돈 쓸 데는 많은데, 일이 없으면 수입이 없으니 걱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통번역사의 경우, 통역과 번역 외에도 다양하게 ‘부수입’을 창출할 수 있다.
나는 영어를 가르치는 일—영어 회화나 작문 등—도 가끔 한다.
누군가는 시시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도 나는 가볍게 여기지 않고 열심히 한다.
누구를 가르치며 얻는 기쁨은 통번역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기쁨이다.
가르치는 기쁨과 함께 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통번역이 아닌 다른 일에 종사하는 프리랜서의 경우에도, 어떻게 하면 본인의 특기를 본업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 추가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지 한번 고민해봤으면 한다.
4. 스터디하기 (지식 쌓기)
사실상 내가 일이 없을 때 하면 가장 좋을(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활동은 ‘스터디하기’이다.
통역이든 번역이든 그 일을 수행하기까지는 많은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
통역은 관련 배경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고 주요 용어들이 입에 붙을 때까지 달달 외워야 하며, 긴장했을 때도 당황하지 않도록 스터디 파트너와 스터디를 해서 순발력을 키워야 한다.
통역사가 무대에서 유창하게 통역하는 모습이 마냥 멋있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능숙한 통역사라 하더라도 속으로는 많이 떨고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적당히 긴장을 해야 퍼포먼스도 잘 나온다.)
번역의 경우, 원문의 특성을 살려 그에 맞는 스타일로 글을 쓸 수 있도록 다양한 글을 읽고, 또 직접 손으로(또는 컴퓨터 타자기로) 써봐야 한다. 무엇보다 번역한 글은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얼추 아는 내용 같다고 해서 자신의 직감만 믿고 대충 넘어가서는 안된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듯 사전을 찾아보고, 관련 지식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직접 확인하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해야 한다.
결국엔 자나 깨나 공부(!)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상 통번역사는 일이 많을 때는 지식을 쌓고 공부할 여유가 없다.
때문에 일이 없을 때일수록 더 열심히 공부하고, 평소에 공부 습관을 잘 쌓아 일상생활 속에서도 다양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주로 독서를 통해 공부하는 편이다.
인터넷으로 뉴스 기사를 읽거나 잡지를 읽으려고도 노력한다.
직접 트레이닝을 해야 하는 통역의 경우, 동기들과 통역 스터디를 강제로 하려고 한다.
통번역사가 아닌 다른 프리랜서들 또한 관련 직무 모임이나 동호회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거나 관련 분야 전문 서적을 읽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지금까지, 프리랜서가 일이 없을 때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한번 쭉 적어봤다.
나도 이렇게 일 없이 한가한 시기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려 노력할 것이다.
적어도 일을 위해 항시 대기 중이라든지, 불안하다 못해 안달이 나거나, 기다리다 지치며 내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