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색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빨강색 좋아하시나 봐요?"
새빨간 표지의 에세이를 출간한 이후, 나의 일상과 인스타그램 피드까지 온통 빨강으로 도배되자 이런 질문을 자주 받게 됐다.
음, 사실 저는 원래 파스텔컬러를 좋아하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어쩌다 나의 첫 책 표지가 강렬한 빨강이 되었을까.
“다음 모임에는 표지를 준비해 오세요.”
독립출판 모임의 막바지로 향해가며, 표지를 완성해오라는 최종 미션이 주어졌다.
표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막상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덜컥 맡기려니 아무래도 영 찝찝했다. 누군가에게 외주를 주면 추가로 돈이 나가는 것도 싫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기 위해 시작한 독립출판 모임인데,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애초에 나는 글을 모아 출판사에 투고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만도 장하다, 하고 이쯤이서 이만 멈출까.
그러다 문득, 방구석 한쪽에서 먼지만 모으고 있는 아이패드가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인스타툰을 그리겠다며 온라인으로 클래스까지 몇 주간 수강하고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고 기본적인 동작을 취하는 것까지 배웠었다.
내 캐릭터를 만들었다며, 한껏 들뜬 마음으로 여기저기 보여주고 인스타에도 공개하곤 했었는데, 열정도 그때만 잠시 반짝했을 뿐. 이제는 넷플릭스 보는 용도로나 가끔 사용하는 화면으로 전락한 기계였다.
조금 어설프더라도 표지 그림, 내가 한번 해볼까? 이참에 다시 아이패드랑도 친해져 보고.
표지란 것이 무엇이며, 표지 디자인의 이론 따위는 배운 적 없지만, 본능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표현해 보기로 했다. 제목 오 마이 갓김치! 를 캔버스 한가운데 적고 나니, 직관적으로 떠오른 이미지는 '오 마이갓!' 하며 당황하는 표정의 주인공(나). 그리고 오 마이 갓김치의 '김치'였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끄적이기 시작했다. 예전에 만들어놓은 내 캐릭터를 표지 정중앙에 그려 넣고, 책 제목 '오 마이 갓김치'의 김치를 그려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김치를 그림으로 표현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배추를 그리고 나서 빨강색으로 색칠하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조금 유치하지만, 김치가 허공 여기저기에서 마구 떨어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나저나, 내가 이제껏 한 번이라도 김치란 것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은 적이 있던가?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아무래도 그런 경험은 없는 것 같았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아무래도 이건 내가 도저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김치 그리기에 포기를 선언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표지 일러스트를 접은 건 아니었다.
'김치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김치를 상징하는 빨강색으로 바탕을 칠해버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새빨간 김치색 표지다. (아래 사진)
그리고 여러 번의 어설픈 김치 그리기 시도 끝에 얻은 교훈 하나는
'심플 이즈 베스트!'
아무래도 내겐 전문가처럼 멋지게 그릴 기술이 없으니, 최대한 대상을 단순화해 보자. 그렇게 해서 그린 그림이 바로 노트북 한대 앞에서 당황하는 표정의 캐릭터다.
그러니까, 요약해 보면, 애초에 김치를 살리고 싶었으나, 도저히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어 궁리하던 차에 김치를 대표하는 색깔인 빨강색으로 바탕을 전부 채워버린 것.
가끔 “표지에는 돈을 아끼지 마세요.”라는 조언을 SNS에서, 특히 출판 전문가들의 커뮤니티에서 보곤 한다. 하지만 나에게 표지란, 단지 내 글을 담아 세상에 선보일 '물리적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큰 계획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얼렁뚱땅 만들어버렸다. 지나친 정성을 쏟기보다 완성하는 데 의의를 두었고,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이거나 오래 고민하지도 못했음을, 부끄럽지만 이제야 고백한다.
내가 직접 그린 표지에 대단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유치한 그림, 지극히 단순한 그림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렸기에 나다움이 묻어난다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만약 내 마음에 쏙 드는 표지를 위해 완벽을 기하느라 출간 일정을 미뤘다면, 내 책은 끝내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렇게 직관적으로 탄생한 나의 아마추어스러운 표지는 '귀엽다'는 반응을 많이 받았다. 어쩌면 내가 직접 그렸기에,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아마추어 같다는 이유로 독자들이 내 책을 사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을 구매해 준 독자님들께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빨강 표지’ 효과도 상당했다. 큰 뜻 없이 단순하게 채워버린 표지의 색깔이 의외로 사람들 눈에 확 띄는 효과가 있었던 것. 북페에서 내 책을 산 사람들 대부분이 “표지가 빨강이라서 강렬해서”, “인상적이어서”를 구매 이유로 꼽았다. 북페어 현장에서 직접 책을 팔 때 내가 느낀 점은, 빨강 표지가 걸어가던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내 책은 '빨강 책'으로 알려지기까지 했다. 서점에서는 내 책의 제목을 언급하기 전에 '그 빨강 책'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아, 그 빨강 책!" "빨강 부스 작가님!" 하며 기억해 주신 분들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 하나.
알고 보니 갓김치는 새파란 부추처럼 생겼더라는...
오 마이 갓김치! 그럼 표지는 빨강이 아니라 초록이어야 했던 거잖아?
... 뭐, 그래도 빨강 효과 톡톡히 봤으니, 넘어가 줍시다. :)
올해 출간을 준비 중인 에세이 《오 마이 작가님! 번역가인데요, 혼자서 책을 내버렸습니다》(가제)에 대한 더 많은 소식은 인스타그램(@by_jasminelee)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