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전문직의 무거움 사이에서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솔직히 번역가란 직업에서 오는 부담감이 있었다.
늘 조용히 뒤에서 남의 글을 옮기는 위치에 있다가, 갑자기 전면에 나서서 내 글을 드러내려니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굳이 내 글쓰기 실력을 만천하에 드러내기로 한 것이 과연 잘한 판단일까. 자칫했다가 오히려 내 본업에 악영향만 미치는 건 아닐까.
에세이라는 장르는 따로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쓸 수 있는 것이라고들 했다. (번역이 아닌)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하필 글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아 완전히 초보라고도 보기 애매한, 그런 초짜 작가였다. 번역가의 글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글에 대한 기대치가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남들에게는 쉽사리 말 못 할, 어찌 보면 스스로 만든 압박감에 한동안 시달렸다.
그럼에도 굳이 에세이를, 그것도 한없이 가벼운 문체와 가벼운 제목으로 첫 에세이를 쓰게 된 것은 순전히 나의 평소 취향 때문이다.
매일같이 남의 글을 옮기느라 꼼꼼히 관련 배경지식을 검색하고, 논리와 흐름, 구성을 고민하며, 사실 진위여부 등을 따져 치밀하게 작업하는 번역가가 텍스트 다루는 일이 질리지 않는다면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여가 시간이나 순전히 쉬는 시간에 읽는 책은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전에는 가장 좋아하는 책의 장르가 두말할 것 없이 소설이었는데, 한국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제는 소설을 읽는 행위마저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결국 최근 들어 가장 즐겨 읽는 책은(일명 ‘내돈내산‘한 책) 대부분 에세이다.
사람 냄새가 나서일까. 언제부턴가 편한 마음으로 자주 찾게 되는 에세이.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류는 인생의 고달픔을 토로하는, 솔직함을 넘어 징징거림을 담은 그런 성격의 에세이다. 결국 우리 모두 위로받고 싶은 존재이며,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를 확인하고 싶어서 읽는 게 바로 에세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내가 쓰는 책에는 최대한 꾸미지 않은 나의 평소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동시에 번역가로서의 경력 자랑도 은근슬쩍 은연중에, 얄밉지 않게 담고 싶었다.)
당연히 '있어 보이는' 진중한 번역가 에세이를 쓸까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내가 직접 쓰고 펴내는 첫 책이 될 텐데, 내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멋있는 번역가로 드러나고 싶은 욕망도 컸다.
하지만 결국, 그런 책이 진정 나다운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쉽게 답할 자신이 없었다. 진중하고 깊이 있는 글을 쓰겠다고 생각만 해도 왠지 마음이 갑갑해져 왔다. 내가 평소 즐겨 읽는 에세이는 결코 그런 무게감 있는 에세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세상의 지식을 꾹꾹 눌러 담은 묵직한 책보다 별 기대 없이 펼쳤다가 나도 모르게 술술 읽게 되고, 그 속에서 간접 경험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그런 책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유유 출판사에서 펴낸 각종 실용 에세이나 신변잡기식 업세이.
더군다나 요즘처럼 책 안 읽는 시대에 책이란 것을 한번 읽어보려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장르가 가벼운 에세이라 판단했다. 실제로 평소에 내가 번역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들을 풀고자 서점에 가면,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번역가 에세이 대부분이 무겁고 진지한 책들이다. 정독하겠다며 야심 차게 사놓고, 정작 집에 데려와서는 한두 장 읽다 말고 방 한구석에 방치해 둔 책들이 많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누구나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도 분량도 모두 가벼운 책을 만들기로 했다. (가벼운 번역가로 비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 그 무렵 어느 작가의 북토크를 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한 손에 들어와 어디든 들고 다니기 쉬운, 가이드북 사이즈의 책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 이 책을 참고로 하자! 그렇게 작고 가벼운 실용 에세이를 만들기로 정했다. 가이드북 콘셉트로, 술술 읽다가 나도 모르게 유익한 정보도 얻게 되는 '실용 에세이'. 가볍고 작아서 가방에 쏙 넣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펼쳐볼 수 있는 그런 판형의 책.
다행히 훗날 정하게 되는 책의 제목과 부제 <오 마이 갓김치! K콘텐츠 번역가의 생존 가이드>에 이 작고 간편한 판형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아직까지도 내 책을 누군가에게 홍보할 때면 ‘번역가가 너무 가벼운 게 아닌가, 이게 과연 나의 평판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긴 할까’ 걱정부터 앞선다.
하지만 "번역가가 이렇게 웃길 줄이야", "책 너무 재밌어요!"와 같은 말을 들을 때면, 괜스레 뿌듯함을 느끼며 적어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었으면 하는 나의 목표는 달성했구나, 거기다 덤으로 ‘개그 부심‘까지 느끼곤 한다.
어쩌면 나는 조금은 가볍고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올해 출간을 준비 중인 에세이 《오 마이 작가님! 번역가인데요, 혼자서 책을 내버렸습니다》(가제)에 대한 더 많은 소식은 인스타그램(@by_jasminelee)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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