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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민 Oct 19. 2021

백 미터 달리기형 인간

'적당히'가 어려운 프리랜서

지금은 관절이 후들거려서 잘 달리지 못하지만 어릴 적, 정확히 말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엔 단거리 달리기를 제법 잘했다.

백 미터 달리기나 오십 미터 달리기를 잘했던 나는 체육회가 열리면 늘 릴레이 경주 선수로 뽑혔다.

그것도 승패를 가르는데 중요한 마지막 주자 또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주자를 맡곤 했다.


체구가 작은 게 유리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에서 늘상 앞 번호를 차지하던 작은 애가 참 날쌔게도 잘 달렸다. 덕분에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도 곧잘 들었다.

아마 어릴 적부터 다른 건 몰라도 순간 집중력만큼은 강했나보다.


반면, 장거리 달리기에는 젬병이었다. 체력이 워낙  안 좋아서 운동장 한두 바퀴만 돌아도 쉽게 지치곤 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적엔, 체육시간에 기본으로 운동장 열 바퀴를 돌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체육 수업을 시작했는데.

외국 아이들은 어찌나 체력이 좋던지, 열 바퀴를 다 돌고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그런 애들과는 달리, 나는 헥헥대며 운동장 돌기에서 늘 꼴찌로 들어오는 바람에 운동 못하는 애 이미지를 달고 살았다.

결국, 스포츠 경기를 위해 팀을 짤 때면 선택받지 못해 맨 마지막까지 혼자 남겨지곤 했다.


인생은 장거리 마라톤이라는 비유를 많이들 한다.

내겐 그런 '장거리 이론'이 여러 면에서 무척이나 불리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단거리를 전력 질주한 후, 다음번 달리기를 하기까지 어느 정도 휴식이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어딜 가든 처음에는 눈에 띄는 성취를 이뤄냈지만, 그것을 오랜 시간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한마디로 체력이 '후달렸다.' 순간 집중력이 뛰어난 편이었지만, 그 집중력을 장기간 이어가지는 못했다. 뭘 하든 장기전이 어려웠다.


아마 그런 이유로 직장생활도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언제나 처음에는 남들보다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냈던 것 같다. 첫 회사에서도, 이직한 회사들에서도.

전력 질주한 만큼 성과도 늘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성과를 인정받고 나면, 힘에 부쳤다.

하지만 함께 일한 상사나 팀은 내게 늘 그 속도로 달리기만을 기대했다. 열심히 할수록 더 많은 걸 기대했다.

회사에서는 직원의 캐파가 늘어나면 더 늘리려고만 했지, 한 번 늘어난 캐파가 줄어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어찌어찌해서 일을 처리하고 나면 더 많은 일을 처리하기를 바랐다. 일은 점점 더 많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쏟아붓고 쉬어야 하는 내게 직장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회사는 나인 투 파이브(혹은 파이브를 훌쩍 넘어서), 주 5일 계속 돌아갔다.

가끔 휴가를 낼 수 있었지만 휴식은 그때뿐이었고, 돌아오면 더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첫 직장에서 번아웃을 경험하고 나서는 얼마간 휴식을 취하고 에너지를 충전했다.

이직하면 다음 회사에서는 절대 내 100퍼센트를 다 쏟아붓지 않겠어, 단단히 다짐했다.


하지만 사람이 어디 그렇게 쉽게 바뀌던가. 또다시 내 한 몸 바쳐 회사를 위해 전력 질주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아 맞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말아야 롱런한댔는데, 스스로를 제어하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그럴 때면, 사수로부터 '지민이는 가끔 몸을 너무 사려. 이건 제가 하는 일 아닌데요 하고 딱 선을 긋는 느낌이야.'라는 핀잔을 듣곤 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아, 좀 더 열심히 해야지, 하고는 또 지나치게 열심히 해서 머지않아 지치곤 했다.

다 쏟아붓거나 아예 발을 다 빼버리거나. 발을 뺏다고 질책받거나. 늘 이런 식이었다.

뭐든 '적당히'하는 게 참 어려웠다.

이런 날 옆에서 보던 한 동료는 프로젝트를 처음 맡고 열정에 타오르는 내 모습에, '살살하라'는 조언을 하기까지 했다.


회사에서 남들이 '적당히 시간 때우면 된다'는 일도 내게는 너무 어려웠다.

에너지를 쓰지 않고 아끼려는 데도 어지간한 에너지가 들었다. 일 없을 때 안 노는 척 노는 일도 어려웠다.

이럴 거면 학교 다닐 때 왜 선생님 말을 잘 듣고, 성실히 숙제하고,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살아온 걸까.

이럴 거면 열심히 하는 척하면서 몸 사리는 법, 겉으론 바빠 보이면서 뒤로는 베짱이처럼 시간 때우는 법 등을 가르쳐줄 것이지...

내게는 자라면서 배우고 습득한 ‘열심히’와 사회에서 실제로 적용해야 하는 그것의 간극이 너무도 컸다.


그냥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고 그에 대해 마땅한 인정을 받고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일이 편하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게 바로 프리랜서로 일하기였다.


그런데 회사 밖으로 나왔더니, 나 같은 이런 '백 미터 달리기형 인간'이야말로 프리랜서 일을 하기에 적임자임을 느낀다.

쏟아붓고 쉬고 쏟아붓고 쉬고.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하고 쉬고, 또 다음 시합을 준비하고.


물론 가끔은 이런 백 미터 달리기 일거리들이 연달아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일들 사이에는 잠깐의 휴식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잠깐의 휴식기는 어찌나 달콤한지!


가끔 도무지 힘에 부칠 때는 내게 들어오는 일에 No라고 답할 수도 있다.

물론, 다음 일거리가 끊어질까 봐 들어오는 일을 거절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미 몇 차례 함께 일하며 스스로의 능력을 인정받은 경험이 있다면, 몸을 혹사시키기보다는 거절을 하고 컨디션을 관리해 다음 달리기를 준비하는 게 더 현명하다.


나는 프리랜싱이 단순히 ‘일’만이 아닌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본다.

누군가는 마라톤 달리듯 하루하루 매일 정해진 시간, 직장에서 규칙적으로 일하는 루틴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정해진 시간에 따박따박 매일 일하는 것보다, 백 미터 달리기처럼 짧고 굵게, 본인의 집중력과 에너지가 충분히 채워져 있는 시간에 집중적으로 일하는 루틴이 맞을 수 있다. 물론, 나는 그 후자다.


만일 당신이 회사에서 쏟아붓고 방전되기를 반복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회사보다 프리랜서가 체질적으로 더 잘 맞을 수도 있다.

물론,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에는 그 외의 여러 요소들이 작용하지만, 적어도 집중력과 에너지 면에서는 그렇다.


한때 나는 다 큰 어른이 왜 이렇게 스스로의 집중력과 에너지를 통제 못하나, 스스로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생각보다 사회는 나 같은 백 미터 달리기형 인간, 단기 프로젝트형 인간을 꽤 많이 필요로 함을 느낀다.


문득 쏟아붓고 쉬는 삶이 제법 편해지고 감사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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