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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민 Mar 07. 2021

선지 해장국과 '예스 걸'

직장의 추억

하고 많은 직장생활 에피소드 중 왜 하필 그 점심시간이 또렷이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두 남자를 따라 처음으로 선지 해장국을 먹어본 그 날...


이직 후 새로운 회사에 출근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던가. 갑자기 지원부서의 부사장님과 부장님이 점심을 같이 먹자며 날 부르셨다. 두 분은 전날 과음을 하셨던지 평소보다 얼굴이 좀 칙칙해 보였다. 부사장님이 제안한 메뉴는 선지 해장국. 그때까지만 해도 난 말로만 들어본 음식이었다.


"지민 씨, 선지 해장국 먹을 줄 알아?"

"아... 사실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요."

"그래? 그럼 이번 기회에 한 번 먹어봐. 으허허허."

"......"


부사장님의 말에 난 아무런 거절의 의사도 표현하지 않았고, 결국 경력으로나 나이로나 나보다 한참 윗사람인 두 남자에게 끌려가듯 해장국집에 들어갔다. 하필이면 콩나물국 하나 없는, 메뉴로는 달랑 선지 해장국이 전부인 곳이었다. 부사장님은 즉시 해장국 세 그릇을 주문하셨다.


이윽고 내 앞에 선지 해장국이 놓였다. 그 거무죽죽하면서도 핏기 서린 비주얼부터가 내 입맛을 뚝 떨어뜨렸거니와... "나이 들어 입에 구멍이 생겼나. 난 왜 이렇게 자꾸 흘리는지 모르겠어. 으허허." 하며 국물을 뚝뚝 흘려가며 먹는 부사장님의 모습을 보니 그 국물을 들이켤 마음이 싹 사라졌다.


겨우 억지로 몇 입 먹었는데—정확히는 먹는 시늉만 했다—아무래도 난 잘 모르겠더라. 그 흐물흐물, 물컹한 식감의 선지와 밍밍~한 국물은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그리고 궁금했다. 그들은 정말 그게 맛있어서 먹는 건지. 해장에 진짜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건지. 알고 보니 부장님도 나처럼 부사장님 눈치를 보며 끌려온 건 아닌지. 남자들은 원래 이런 걸 다 좋아하는지.


그 당시 나의 직장 생활을 돌이켜보면, 나는 대개 '예스 걸'이었던 것 같다. 뭘 시켜도 "네,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런 거 먹으러 갈래란 질문에도 "네, 한번 먹어보겠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제안에 예스라고 답하며 나 자신을 스스로 밀어붙였다.


싫은 티 안 내고 묵묵히 따르는 내가 편했던지 상사들은 "지민 씨도 같이 가자"며 날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 그 바람에 나는 점심시간마다 끌려다니며 낯선 사람들과 불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내가 이런 걸 들어도 되나 싶은 비즈니스 대화를 엿듣기도 하고, 사무실에선 볼 수 없었던 상사의 인간적인(철없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회사 못 다니겠다며 죽어가는 소리 하는 것도 종종 들었다.


결국 예스 걸은 지친 몸과 마음으로 회사를 나왔고, '내가 왜 그렇게까지 사람들에게 맞춰주려 애쓰며 스스로 고역을 자처했을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회사를 좀 더 오래 다닐 수 있었을까,' '원래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건가, 아니면 나만 너무 오버한 건가,' 퇴사 후 한참을 궁금해했다.


그 후로 대학원 입시 준비, 입학, 진급, 졸업 등 온갖 파란만장한 시기를 거쳐 이제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직장생활의 기억이 선지 해장국이라면, 지금의 프리랜서 생활은 훗날 무엇으로 기억될까. 통역을 앞두고 긴장된 위를 달래려 먹는 뜨끈한 쌀국수, 마감에 쫓겨 급하게 들이켜는 라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대개 중요한 통역을 앞두고는 국물이 들어간 음식을 먹는다. 너무 긴장해서 위가 경직돼 뭔가를 먹었다간 바로 얹힐 것만 같은데,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먹자니 배고파서 집중력이 흐려질 것 같고...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게 바로 국물 들어간 음식이다. 단단히 굳어진 위장을 풀어줄 수 있는 '따끈한' 국물이면 더 좋고. 주로 쌀국수를 많이 먹는데, 왠지 밀가루 면이나 인스턴트 면보다는 쌀로 된 국수가 소화도 더 잘되고 몸에도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내 나름의 기준으로 고심해 고른 메뉴다.


굵직한 번역 프로젝트의 마감을 앞두고도 국물을 찾는다. 특히 번역 마감 당일엔 식사하러 잠깐 밖에 나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집에서 라면을 끓인다. 조리도, 먹는 것도 전부 빨리 해치울 수 있으니까. 국물과 함께 꼬불꼬불한 면을 대충 씹어 후루룩 넘겨버린다. 평소엔 그토록 느리게 먹는 나지만, 라면 한 그릇을 비우는 데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아, 프리랜서 생활 이거 진짜... 이름만 프리하지 정작 빛 좋은 개살구 아닌감. 뒤에서 이토록 전전긍긍하며 궁상떨고 있는 걸 누가 알아줄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이내 '으이구~~ 이지민, 네가 요즘 아주 배가 불렀구나?' 비록 잘 안 먹혀서 먹는 국물도, 마감에 쫓겨서 허겁지겁 먹는 라면조차도 그 옛날 옛적 억지로 입에 욱여넣은 선지 해장국에 비하면야!


앞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국물 요리들을 찾아 나설 계획이다. 최근에 쌀국수, 라면만 주구장창 먹었더니 좀 질리긴 하더라고요. 으허허...  


#선지해장국 #직장생활 #프리랜서 #통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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