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버지마저 인원감축으로 실직하게 되면서 강수네 집안 분위기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 인생의 맨 밑바닥을 보는 심경으로 아파트 경비직을 꾸역꾸역 했던 아버지는 자신이 그토록 하찮게 여긴 자리에서마저 내쳐지고 말자 모든 기력을 소진한 사람처럼 몸짓마저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마치 망망대해에서 구조선을 기다리는 난파선처럼 망연히 베란다에 앉아 하늘을 보는 것을 주 업무로 삼았다. 다만 일평생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강수만이 이런 상황에 도가 터 있었다.
강수는 아버지가 마른 한숨으로 시간을 메우든 어머니가 매일 파스 냄새를 풍기며 다른 집에 파출부로 나가든 개의치 않는 모양새로 헨젤과 그레텔이 그랬던 것처럼 감자칩 부스러기를 가는 곳마다 흘려댔다. 가족들도 부스러기의 형체로 강수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 강수가 집안에 들어앉았을 때는 몇 번의 다그침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야구로 다져진 훌륭한 풍채에 섬광처럼 빛나는 콧날을 가진 강수의 외모를 이 좁아터진 집구석에서 썩힐 수야 있겠냐고 그의 어머니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적도 있었지만 강수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방구석과 그의 몸 어딘가에 자석이 붙어 있기라도 하듯 강수는 점점 방에서 나오지 않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가족들은 포기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부모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강수의 시선을 외면했고 어머니는 아예 말을 붙이는 것에도 의지를 상실해버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산송장이오, 가구 옆에 다른 가구 정도쯤이었다. 다만 가끔 들르는 누나가 용돈을 쥐어주면 오래 묵은 장독을 열듯 그제야 부모님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철면피 강수라도 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뉴스에서 다 큰 자식이 부모의 훈계에 화가 나 그들을 때려죽였다느니 게임중독에 빠진 장년의 아들이 아이템을 빼앗기고 홧김에 집에 불을 질렀다는 기사가 나올 때면 그들도 모르게 움찔하며 강수를 돌아보곤 했으니 말이다. 내가 저 나이에 저 혈기면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아버지가 이렇게 혼잣말이라도 할 때면 강수는 성을 내기 바빴는데 흡사 포효하는 곰처럼 거침이 없었다. 기가 질린 부모님은 그저 정오까지 퍼질러 자는 강수를 문틈으로 바라보며, 조그맣기라도 하면 밤에 어디 버리고 올 수 있을 텐데, 하고 자조 섞인 농담만을 할 뿐이었다.
물론 강수라고 미안한 마음이 아예 없을까. 하지만 강수에게도 나름의 변명은 존재했다. 강수는 학창 시절에도 아르바이트 근처에는 갈 수 없었다. 그 무렵만 해도 전도유망한 야구 선수였고 아버지는 직장 내 정치의 달인이었다. 덩치값도 못할 만큼 자신을 오냐오냐 키운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선택이자 욕망이었다. 그는 자기 인생의 전성기를 강수로써 장식하고 싶어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코 푼 휴지를 곱게 접어 방바닥을 한 번 더 닦고 버리거나 하얀 입김이 담배연기처럼 뿜어져 나와야만 보일러를 틀 수 있던 때가 아니었다. 강수를 군대에서 면제시키고 그것이 마치 독보적 능력인 듯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던 모습은 이제 아득한 저편의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강수에게 생활의 모든 제반 사항을 안락하게 제공했지만 강수가 그 안에서 획득한 것은 자신이 자기의 인생의 컨트롤하고 있다는 ‘착각’뿐이었다. 과욕과 허세가 부메랑이 되어 아버지와 강수를 후려칠 때야 강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인생의 그 어느 것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다. 결국 우두커니 멈춘 것은 강수뿐이었고, 그 멈춤의 시간은, 강수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말 저녁 난데없이 땀에 젖은 누나와 조카가 들이닥쳤다. 조카는 일곱 살 다운 천진한 얼굴을 하고 영어로 된 동화책을 신나게 읽었다. 강수는 그런 조카에게 괜히 장난을 쳤다. 누나는 더러운 것이 묻기라도 하듯 강수의 손을 잡은 조카를 휙 낚아채더니 말없이 밥만 먹었다. 부모님 쪽에서도 미리 무슨 언질을 받은 것인지 캐묻는 말없이 줄곧 밥에 집중했다. 밥을 다 먹고 주방에서 과일을 깎아 온 누나가 강수에게 먼저 사과 한쪽을 내밀었다. 그는 누나에게 늘 하던 대로 고맙다는 말 대신 발가락으로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누나는 화내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강수가 다시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갑자기 누나가 눈물을 터뜨렸다. 나 이혼할지도 몰라. 그제야 강수의 눈에 커다란 짐가방 하나가 보였다. 누나가 운 것이 언제였던가. 아버지의 어깃장으로 가난한 첫사랑과 헤어지고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도움 한 번 안 구하고 홀로 아이를 낳아 당당히 집으로 걸어오던 위인이었다. 저 좋다는 남자의 광활하게 까진 이마를 바라보며 몰래 구역질을 하다가도 탄탄한 그의 집안 내력에 눈을 질끈 감고 결혼식장으로 들어가던 여자였다. 누나는 터진 둑처럼 한탄을 쏟아내길 시작했다. 특유의 악바리 근성을 일찌감치 가불 받아 전부 탕진한 사람처럼 처연한 꼴로 우는 와중에도 짐짓 매형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해도 정도가 있지. 남의 자식 내 자식처럼 사랑 주고 먹여줘, 힘들어도 앞만 보면서 어떻게든 희망 하나 찾으려고 했어, 내가. 근데 네 집구석은 돈 먹는 하마냐, 사람들이 정도가 있지, 내가 하루 12시간을 넘게 주말까지 일하면서 그 놈팡이 같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되냐? 내가 뒷구멍으로 돈이 솔솔 나가는 거 참아줬어, 근데 이건 너무 하잖아, 우리 부모님은 빤스 한 장 못 사주면서 네 식구들은 씨발 족발 처먹고 뭐 처먹고.”
누나는 빙의한 사람처럼 집을 나오기 전 마지막 순간을 재현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한숨도 내쉬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보며 사과를 먹었다. 누나의 하소연은 오늘 안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남자야 또 만나면 되잖아, 강수의 말에 누나가 혐오에 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넌 상황 파악이 안 되냐? 누나가 앙칼지게 뿜어대자 강수는 낮게 욕지기를 내뱉고는 뒷머리를 긁으며 방으로 갔다.
그날 이후부터 누나와 조카는 당연하다는 듯이 강수네에서 함께했다. 집은 18평짜리 주공아파트였고 더위를 식혀주는 것은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2대가 전부였다. 방은 3칸이었지만 안방과 강수 방을 제외한 나머지 방은 어른이 몸 하나 뉘이면 딱 알맞은 창고였다. 누나는 그곳에 조카와 짐을 풀었다.
누나는 아침이면 강수 방에서 컴퓨터로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다. 할 수 있는 일들이라곤 단순노무직이었지만 누나는 최대한 좋은 조건의 일자리가 없는지 살폈다. 오후에는 마트에 알바를 하러 갔고 그 사이 조카는 아버지가 돌봤다. 아버지는 원래 조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누나의 인생을 조진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조카가 말이 트이면서부터 이상한 질문을 많이 해댔기 때문이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도무지 쓸모없는 생각들. 애가 너무 말이 많아, 아버지의 핀잔에 누나는 늘 그렇듯 성을 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이 영민함에 대한 단서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아버지는 조카의 똘똘한 모습을 볼 때면 진즉에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그리고 무언가로부터 조카를 보호하려는 듯 늘 조마조마하게 아이를 감쌌고 급기야 쌍둥이 행성처럼 조카 옆만 빙빙 도는 모양으로 하루를 보냈다. 조카는 또래처럼 정신없이 집안을 헤집고 뛰어다니는 법은 없었지만 늘 책을 끼고 깔깔 웃으며 무언가 조잘거렸다. 가끔 영어로 말하는 걸 들어보면 외국에서 살다 왔다고 거짓말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가족들은 뺨 한구석에 징그럽게 눌어붙은 침울함을 전부 씻어내진 못했지만 조카의 재롱 앞에서만큼은 본 적 없는 미소를 짓기 일쑤였다.
-예전에 검사한 적이 있는데 애가 영재래.
-확실해? 애 영재라 그러고 학습지 신청하라는 그런 게 아니고?
아버지가 누나의 말을 듣자 취조하듯 물었다.
-어린이집에서 애가 남다르다고 해서 검사한 적이 있어. 언어능력도 뛰어나고 공간지각 능력도 좋대. 아무튼 상위 몇 프로라 그랬어.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야, 애가 영재라는데 이러고 있어서는 되겠냐. 우리 지씨 가문을 다시 일으킬 장본인이 될지도 모르는데. 친아빠 쪽에는 연락이 안 되냐? 양육비라도 어떻게 좀…….
-아, 진짜. 아빠가 그 사람한테 한 걸 생각해. 이제 와서? 요즘 세상에 자기 핏줄 만났다고 감격해서 울고불고 뭐 그런 일이 가능할 거 같아? 그 사람도 벌써 애가 둘이야.
누나의 눈빛이 단호하게 빛났다. 아버지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놔둬도 되는 거냐? 어디 학원 같은 데 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타고난 거니까 그게 없어지진 않겠지만……. 뭐 그런 영재 관련된 학원들이 있다고는 하던데. 모르겠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학원이 대수야? 이러다 굶어 죽을 수도 있는데.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가죽이 다 갈라진 소파에 다리가 쩍쩍 달라붙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쫓기는 사람처럼 발 한쪽을 달달 떨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전 포고하듯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해보마. 어떻게든.
아버지의 ‘어떻게든’은 흘러가는 다짐이 아니었다. 그는 조카가 깨어있는 시간에는 온통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아이가 잠든 밤이 되면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나 어디론가 슬며시 나가기를 반복했다. 강수는 아버지의 수상한 거동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아이까지 돌보느라 밤에 그 짓을 하고 돌아오면 늘 앓는 소리와 함께 축 늘어져 있었다. 며칠 뒤에는 조카와 함께 나간 아버지가 영어 학원 하나를 덜컥 등록했다. 아버지는 믿는 구석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결의에 찬 눈빛으로 자신만 믿어보라고 했다. 장기라도 팔 셈인가, 강수는 그들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아버지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한때 자신의 가능성에 무모한 베팅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강수가 쓸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선풍기 돌아가는 모터 소리만 가득하던 저녁에 손님이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남자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달달 거리는 선풍기 앞에 앉아 묽은 믹스 커피를 휘휘 젓던 남자가 못 참겠다는 듯 강수 씨는 어디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그제야 어머니는 당황스럽게 움직이는 둔부를 그대로 내보이며 강수의 방문을 두드렸다. 집은 좁고 방음은 최악이라 바짝 대고 말하지 않아도 죄다 들렸지만 강수는 한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남자는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이고는 여전히 커피를 저었다. 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자 강수가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술냄새가 났다.
-왜? 뭐?
-손님이 오셨는데 널 좀 보고 싶다고 하셨어.
-손님? 무슨 손님?
-일단 나와서 인사라도 좀 해라. 버릇없이.
-뭐? 언제는 손님 왔다고 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라면서?
어머니는 민망하게 남자에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는 초조하게 몸을 들썩이며 방문 앞을 보았다. 몇 번 실랑이 끝에 강수가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어기적거리며 거실에 앉았다. 무릎에 감자칩 가루가 달라붙어 있었다. 남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강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머니는 조카를 치마폭에 훔치듯 안아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강수가 어색하게 손을 잡았다.
-반가워요, 강수 씨.
강수가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주식회사 몸 교육 이사 조오진’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강수 씨 한 번 보고 싶었어요. 아버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해요.
남자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저는 보다시피 이런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요. 아버님 부탁으로 강수 씨를 직접 만나러 왔습니다. 듣던 대로 체격이 아주 좋으시네요.
강수가 남자의 말에 입꼬리를 한쪽으로 당겼다.
-이 사람 누구야?
강수가 아버지를 보면서 말했다. 남자는 강수의 무례함마저 아버지에게 일찍 들어왔다는 듯 별다른 내색 없이 말을 낚아챘다.
-명함에 쓰여 있다시피.
-그건 알겠는데 나를 왜 보려고 하는 건데요?
아버지가 강수의 무릎에 넌지시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남자에게 알아서 설명하라는 듯 망연히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강수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요.
-왜요?
-저희 회사에 와서 일하기에 어떤지 한 번 보려고요.
-일?
-네. 정식으로 돈을 버는 일. 근데 생각보다 더 괜찮은 것 같네요.
-뭐가요?
-그냥 느낌이.
-나는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강수야, 일단 이 분 말씀을 좀 잘 들어봐.
-아니, 갑자기 무슨 일? 내가 할 일을 왜 이 사람이 정하는데?
-강수야. 제발 좀.
강수가 눈을 부라리며 남자, 조오진을 바라보았다. 조오진은 특유의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지만 강수의 발칙한 눈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 아버님이 찾아오셔서 이런저런 사정 이야기를 하셨어요. 많이 어려우신 거 다 들었습니다. 제가 아버님께 예전에 신세 진 것이 있고…….
강수가 거칠게 아버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신세? 어디서 구라를 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지금 청탁한 거야? 참 나, 그걸로 망한 사람이 또 그 짓을 해?
-강수야.
-강수 씨. 흥분하지 말고. 물론 아버님이 부탁은 하셨지만 저희 회사에서 안 그래도 사람이 필요하던 참이었어요. 젊고 뜨거운 피가 필요합니다. 강수 씨처럼 가능성 있는 몸을 찾고 있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잠시 침묵,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 괜찮네요. 이만하면 우리 회사에서 트레이닝받으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어요.
-완전한 인간? 그럼 지금 난 뭐 인간이 아니고 개새끼라도 된다는 말인가?
남자는 슬쩍 미소를 짓더니 다정하게 강수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강수 씨. 강수 씨는 자신이 실패자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강수 씨는 실패자가 아니에요.
아버지가 낮게 허, 하고 신음인지 기침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강수 씨, 실패자는 말이에요. 적어도 무언가에 도전해 본 사람에게나 쓸 수 있는 말 아닐까요? 그들은 적어도 사람들에게 동정은 받을 수 있어요. 듣자 하니 수년 넘게 집에만 있었다죠? 아버님도 어머님에 누님까지 일하는데 강수 씨는 뭘 했어요? 조카가 아주 영재라면서요?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에 저 아이 앞날에 어떤 희망이 보입니까? 설마 강수 씨처럼 되길 바라는 건 아니죠?
강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강수 씨는 지금 덩어리예요. 그냥 살아있는 유기체. 하지만 충분히 다듬을 수 있어요. 강수 씨가 나를 믿고 노력하면.
그러면서 조오진은 가방에서 A4 사이즈의 팜플랫을 꺼냈다. 건장한 육체와 자비로운 미소를 품은, 말 그대로 건강한 남녀들이 자신의 매력을 뽐내며 회사의 로고를 밟고 서있는 사진이 보였다. 조오진이 그것을 펴 들어 강수 쪽으로 보이게 놓았다. 회사에서 출시하는 약과 약품에 관한 간단한 설명도 쓰여 있었고 운동기구도 보였다.
-다단계군.
-강수야, 말 좀 가려서 하면 안 되겠냐.
-맞네. 이 약이랑 기구들 지금 사라 그러고 그거 팔고 또 사람 끌어들이면 레벨 올려준다 그런 거 아냐? 영업사원이랍시고 다른 사람들 등치면서 지들 배만 불리는.
-강수 씨. 저희 회사 영업 사원은 대학 나와야 할 수 있어요.
-…….
-그럼 일단 팸플릿을 여기에 두고 갈게요. 제 호의가 부담스럽다면 사양해도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도전은 해보는 쪽이 좋지 않아요? 회사는 이곳에서 좀 떨어진 P시에 있어요. 저는 정확히 일주일 후에 그곳으로 갑니다. 그 안에 마음이 정해지면 나와 함께 회사를 둘러봅시다.
조오진의 태도는 자신만만했다. 강수는 조오진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강수가 코웃음 쳤다. 안방에서는 조카의 새된 웃음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는데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가 강수 씨에게 어떤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아버님이 부탁하지 않았어도 길거리에서 강수 씨를 마주쳤다면 아마 지금처럼 말을 걸었을 겁니자. 강수 씨는 아주 좋은 신체를 가지고 있어요. 알겠죠? 조카에게 자랑스러운 삼촌이 되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군요.
조오진이 나갔다. 강수는 조카에게 아무런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의 말이 우습게 들렸다. 사실 불쌍한 건 누나였다. 조카는 적어도 영재다. 집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강수는 늘 그렇듯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그때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무릎을 꿇은 것이.
-강수야. 내가 그동안 아비로서 너에게 해준 것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안다. 염치 불고하고 또 실직을 맞게 된 건 순전히 내 탓이야. 내가 너한테 뭘 해주려고 해도. 알잖니. 이제는 정말 내가 가진 게 없구나. 그래, 이렇게 된 건 다 내 잘못이 맞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하지만 그 또한 가족을 위한 나의 선택이었다. 너도 매일 집에서 우리랑 복닥거리면서 보내니 얼마나 답답하겠니. 네가 날 원망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다 알아. 내가 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 정말 간절하게 부탁한다.
아버지의 읍소는 폭풍 쳤다. 단호함이나 절제라고는 하나 없이 중언부언이 이어졌다. 강수는 그 순간 자신이 아버지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강수의 절제력 또한 인기 드라마의 다음 회를 기다리는 수준밖에 되지 않음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 모두 주저앉는다고 쳐도 네 어린 조카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내 말을 들어다오. 저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아버지의 머리가 쿵 소리 나게 바닥과 합체했다. 안방에서는 티브이 소리에 뭉개진 웃음만이 시종 끊어지지 않고 계속됐다.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흔들리는 동공이 잔뜩 굶주린 맹금류의 그것과 흡사했다. 강수는 모욕당한 사람처럼 벌건 얼굴을 감싸고 방문을 거세게 닫았다.
며칠 째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끙끙 앓는 소리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부러 강수를 진저리 치게 만들기 딱 좋은 전략이었다. 다 조져버릴 거야, 아주 개망신을 줘버려야지. 모든 걸 망칠 계획으로 강수가 조오진에게 연락한 것은 조오진이 말한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었다. 조오진은 자신의 세단을 몰고 강수네 집 앞에 왔다. 강수는 츄리닝 바람으로 어기적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가족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베란다 틈새로, 마치 영화 샤이닝의 쌍둥이 자매 귀신처럼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부모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강수가 고개를 돌리자 그들은 얼어붙었고 그 모습은 배웅이라기보다는 관람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다. 조오진은 첫 데이트 상대를 대하듯 운전석에서 일어나 직접 차문을 열어 주었다. 강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탔다. 마음의 준비랄 것도 없이 차는 출발했다. 조오진이 권한 카카오 90프로 초콜릿이 바닥을 보일 때쯤 P시에 도착했다. 조오진은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회사라기보다는 거대한 양 떼 목장 같았다. 휴가기간이 끝나면 이곳이 활기로 들끓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조오진의 입술이 번들거렸다. 강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초원 너머를 가늠했지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조오진이 그의 어깨를 쳤다. 강수는 맞춤양복처럼 알맞게 조율된 조오진의 미소가 어쩐지 불쾌했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단정 지을 수 없이 크고 낯선 공간이 주는 압도감 때문이지 집에서와 달리 강수는 순해빠진 양처럼 내내 어리둥절했다. 이윽고 조오진은 목자처럼 그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지나가다 몇몇 사람을 보았지만 그들은 조용히 목례할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조오진은 사무실에 앉아 강수에게 회사 전반의 업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수는 주의를 기울이는 척했지만 거의 흘려버렸고 단지 자신이 여기서 무엇을 망칠 수 있는지만 생각했다. 단련. 극기. 그리고 새로운 탄생. 조오진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고 회사가 강수를 통해 추구하려는 목표는 판타지에 가까웠다. 강수는 자신의 가치를 믿지 않았기에 조오진이 어서 자신이 치를 대가에 대해서나 말해주길 기다렸다.
-할 수 있겠어요?
강수는 100미터를 13초에 주파했다. 조오진은 기대 이상이라는 듯 박수를 쳤다.
-많이 놀았던 몸치곤 괜찮군요.
조오진이 주머니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강수에게 쥐어주고 자신도 한 알을 삼켰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여기서는 자신이 한 노력이 고스란히 몸으로 나타나요. 노력이나 목표가 추상적인 개소리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고요.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고 또 피는 얼마나 신선한지, 내장 기관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내 몸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 우린 다 수치로 정확하게 산출합니다. 운동해봤으니 알잖아요? 강수 씨는 여기서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갓 뽑은 채소처럼 아주 싱싱하게.
-그다음에는요?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주어질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쓸모에 맞는 자리가 있어요. 그걸 위한 준비 과정을 거치는 거라고 생각하면 좋겠군요.
도그쇼에 나온 개처럼 강수는 조오진의 설명에 따라 처음 보는 운동기구들에 몸을 싣고 테스트를 거쳤다. 조오진은 갈수록 흡족해했고 강수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성급하게 계약서에 사인을 한 순간 알게 되었다. 강수는 한 푼도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생활은 철저히 회사 규율에 따라야 하고 자신 앞으로 나오는 급여는 모두 부모님의 통장으로 입금된다. 강수는 이를 갈며 낮게 욕지기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헐값에 팔린 것이 아니길 바랐다. 어쨌거나 숙식은 제공되니까.
그때부터 강수는 회사가 지급한 운동복 형태의 유니폼을 입고 회사가 부여한 고유번호를 부착한 채 회사가 정해준 식단을 먹었다. SF촬영 현장을 방불케 하는 첨단 시설들이 가득한 운동센터에서는 거대한 모니터 속 여자의 지시를 따라 운동을 반복하는 것이 전부였다. 회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굳이 인사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금지였다. 어색한 관계 맺기도, 과거의 무용한 성취들에 대해 고백하며 자신이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강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매일 영양이 가득한, 싱싱하며 식감이 좋은 채소들을 먹었다. 정해진 시간마다 회사에서 개발 중인 약을 복용했다. 실험쥐가 된 기분으로 20여 개의 알약을 삼키길 반복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서서히 그 효과가 몸으로 나타났다. 점점 근육이 붙고 악력도 세졌다. 운동 단계가 상승할 때마다 희열도 느꼈다. 활력이 생기고 눈빛도 맑아졌다. 정기적인 검사도 진행됐다. 연구원 복장의 사람들은 강수를 고유번호로 부르며 출시를 앞둔 전자제품처럼 다뤘다. 강수는 제법 우수제품으로 분류됐다. 홀로 있는 방 안에서 강수는 가끔 자신이 톱니바퀴의 작은 돌기가 되는 꿈을 꿨다. 매일 밤 거울 앞에서 보기 좋게 달라진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일도 잦아졌다.
그리고 그 시간이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절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술이나 담배, 감자칩 따위에 대한 욕구도 깔끔하게 사라졌다. 강수는 애초의 자기 계획은 다 잊은 사람처럼 시스템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회사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자꾸 사라졌지만 강수는 신경쓰지 않았다. 실패한 사람들은 남아 있을 수 없으니. 강수가 충실한 실험쥐의 역할을 하는 동안 집은 예전에 없는 활기를 띠었다. 누나는 능글맞은 얼굴로 더러운 말을 내뱉는 마트 사장의 비위를 제대로 맞춰주며 총애를 얻었고 곧 매니저가 됐다. 어머니는 파출부를 그만두고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 알음알음 판매를 시작했다. 강수가 쓰던 방은 조카의 차지가 되었다. 월급이 들어올 때마다 강수의 물건도 하나씩 정리됐다. 강수가 쓰던 컴퓨터는 모든 자료를 삭제하고 새로이 포맷되어 조카가 쓰고 있었다. 아무도 강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주 조금씩. 마치 지우개로 꼼꼼하게, 잘못 그려진 선을 지워나가듯 강수의 흔적은 이 집안에서 사라졌다.
강수의 누나가 집 앞의 택배 상자 하나를 발견한 것은 계절이 돌아 다시 한여름, 마트의 보수공사로 인해 이른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집 앞에 놓인 상자를 유심히 보던 누나는 발신인의 이름이 강수라는 것을 보고서 놀란 눈으로 상자를 들어 올렸다. 제법 크고 묵직했다. 선풍기 바람에 땀을 말리고 티브이를 켰다. 재벌들이 극비의 생체연구소에서 젊은 청년들의 피로 자신들의 피를 모두 갈아치운다는 내용의 르포시사가 방송되고 있었다. 강수의 누나는 불쾌하다는 듯 티브이를 다시 끈 뒤, 커터칼로 조심스럽게 박스의 테이프를 절개하고 입구를 열었다. 다시 상자가 나왔다다. 참나무로 된 상자에는 용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한눈에 보아도 그 값어치가 상당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참나무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 상자를 다시 조심스럽게 열자 이번에는 주석으로 만들어진 원형의 상자가 다시 나타났다. 주석 위에 정교하게 조각된 사람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나 아무튼 뭐 그런 나라의 사람들이 경배를 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 있었다. 그게 뭐든 굉장히 멋지고 값나가 보인다는 것은 확실했다. 강수의 누나는 휘둥그런 눈에 긴장을 풀지 못하고 주석 상자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다시 주석의 뚜껑을 열자 곱고 얇은 명주 보자기 같은 것이 덮여 있었다. 그것을 살며시 들자 가루가 나왔다. 뭐지? 강수의 누나는 한참을 살폈지만 알 수 없었다. 쓸모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아직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강수에게 처음 받은 선물이었다. 강수의 누나가 감격에 한창 젖어들 때 현관문이 열렸다. 무표정하게 왔느냐고 묻던 어머니가 식탁 위의 주석을 보자 놀란 사람처럼 한달음에 달려왔다.
-엄마, 강수가 보냈어.
-응, 알아, 알아.
-연락했다고?
-응, 뭐 그냥. 뭘 보낸다고 들은 것 같아. 맞아.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강수가 이제 진짜 사람 다 됐나 봐.
엄마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주석 상자를 다시 참나무 안에 넣었다. 엄마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누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와, 진짜 너무하네. 아들내미한테 받았다고 되게 호들갑 떤다. 이거 뭔데? 이거 뭐야?
-귀한 거야. 귀한 거.
-귀한 거 뭐?
-커피.
-커피?
그제야 누나는 무언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안에 커피가루였구나. 근데 색이 왜 이래? 외국에도 믹스 커피가 있나 봐?
-몰라. 그냥 저기, 저기 어디 먼 데서 파는 거래.
-콜롬비아? 아프리카?
-그래, 뭐 어디라고 하더라. 기억 안 나. 아무튼 넣어 놓자. 귀한 건데 넣어 놔.
-아끼다 똥 되는 거 몰라?
-똥이 되던 설사가 되던 손 치워.
누나가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오래전에 느꼈던 동생을 향한 감정이 다시 바닥에서 올라왔다. 누나는 자신이 그런 기분을 다시 느낀다는 것이 조금 우스웠다. 동생이 한창 잘 나가던 때,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찬밥으로 보냈고 그 시간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강수의 누나는 다시 그 시절 소녀처럼 사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새로 장만한 타워형 선풍기에 땀을 말리던 엄마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누나는 참나무 상자를 몰래 꺼냈다. 민첩한 도둑고양이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주석 상자 안 가루를 컵에 탔다. 향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이 끓자 재빨리 부어 휘휘 저었다. 가루는 물과 섞일 듯 말 듯 소용돌이치며 찻잔 안을 맴돌았다. 비싼 커피는 다 이런가? 누나는 뜨거운 잔에 정성스레 입김을 호호 불었다. 한 모금, 두 모금. 그간의 체증이 가라앉듯 몸이 기분 좋게 더워졌다. 날씨 탓이 아니었다. 불쾌감 없이 녹아드는 더위. 이게 바로 이열치열이지, 누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몇 분지나 김을 내뿜으며 화장실 문이 열리고 수건으로 대충 몸을 가린 어머니가 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누나가 인중에 잔뜩 힘을 주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너 지금 그거 먹었어?
-응. 먹으라고 보내온 건데 먹어주는 게 도리 아니야?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헐거운 정수리를 타고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엄마도 한 번 마셔봐.
-아냐, 아냐. 됐다. 저리 치워. 빨리 그거 치워.
-알았어. 이제 안 먹으면 되잖아. 진짜 너무 한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서러워서 살겠나.
-강미야.
-왜?
-그거……맛있니?
-음, 뭐랄까, 처음 먹어보는 맛이야. 하긴 내가 뭐 비싼 커피를 마셔봤어야지.
-그래. 그게 뭐든. 아무튼……맛있었어?”
-응. 나쁘지 않아. 몸이 착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어.
엄마가 몸에 두른 수건을 풀러 얼굴을 벅벅 닦았다. 장막처럼 수건 뒤에 얼굴을 가리고 엄마가 말했다.
-그럼 됐다. 맛있으면 됐다.
이윽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영어학원에 다녀온 조카가 제 엄마를 보자 나비처럼 가볍게 품으로 날아들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아주 오랜만에 가족이 한 자리에 함께 모였다.
-엄마 기분이 좋아 보여.
조카의 말에 누나는 호호 거리며 웃었다. 딸이 품에서 킁킁거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삼촌 왔어?
-아니.
-엄마한테서 삼촌 냄새 나.
누나는 자신의 티셔츠를 잡아당기며 자기 딸처럼 킁킁거렸다.
-난 잘 모르겠는데.
-맞아, 이거 삼촌 냄새야.
딸의 눈이 오묘하게 빛났다.
-삼촌은 이제 안 와?
-나도 잘 몰라.
-나 사실 삼촌이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딸의 말에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누나는 딸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댔다. 아이가 꽃망울 터지듯 요란한 웃음을 내뿜었다. 어느새 주방으로 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강수가 보낸 단지를 보며 저들끼리 계속 소곤거렸다. 그날 밤 아버지는 이사 이야기를 꺼냈다. 조카를 위해 더 나은 환경으로 이주하는 것이 좋겠다고. 누나는 자신의 대표 매뉴얼이라도 되는 듯 자연스럽게 돈 이야기부터 꺼냈다. 아버지는 이번에 결연한 눈빛 대신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다 방법을 마련해놨다. 나만 믿어.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