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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으로 나는 생애

by 존치즈버거


나는 20대 중반 이름을 바꾸었다. 점집에 가서 이름을 바꾸어야 팔자가 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도 아니고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내 기준에 촌스러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 의해 호출되는 신호인 나의 이름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불리길 바랄 뿐이었다. 20년 넘게 불린 나의 첫 번째 이름을 지어주신 부모님은 "네가 원한다면 이름을 바꾸려무나."하고 산뜻하게 대답하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한국에서 고등과정의 교육을 모두 거친 사람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김춘수 시인의 꽃의 일부분이다. 이름을 떠올릴 때면 나는 늘 이 시가 생각난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조금 더 깊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게 된다. 김춘수 시인이 노래했듯, 우리의 존재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부름이 있어야만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것은 직함이 될 수도 있고 관계의 호칭일 수도 있고 애정이 가득 담긴 별명일 수도 있고 그저 나의 이름 하나일 수도 있다.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역할에 따라 이 모든 이름을 다 경험하고 산다. 나는 이름을 바꾸며 생각했다. 나의 꽃이 되고 싶다고. 누군가 나를 불러주어야만 나라는 존재도 의미를 얻겠지만 그가 불러 줄,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나의 이름 정도는 내가 정해도 무방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당시 누구보다 나다운 모습으로 나의 생을 살고 싶었고 그것은 이름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이 되었다. 마법의 주문을 외우듯 나는 새로운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 보았다.


어찌 보면 생이란 이름으로 나는 것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떠올릴 때도 이름부터 내뱉지 않던가. 어떤 이름은 뱉어내고 나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그리움을 남기고 어떤 이름은 여전히 용서할 수 없는 그때 그 날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처음 만나 인사 다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이른바 '통성명'이다. 서로의 이름을 인식하고 그 이름을 불러주며 우리는 완전한 타인의 영역을 벗어나 한 발 더 다가서게 된다. 또한 관계 속에서 이름은, 훗날 누군가 나라는 사람을 회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상징이자 내 삶의 제목처럼 쓰인다. '아, OOO, 원피스를 즐겨 입던 아이! OOO, 언제나 말갛게 웃는 사람.' 그러니 이름은 움직이고 숨 쉬는 살아있는 유기체이자 생각하는 동물이라 불리는 나라는 '사람', 백과사전에 단순히 사람이라는 존재에 분류되어 있던 나에게 이미지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들며 나를 '진짜'의 개인으로 만들어 준다.


그렇게 생각하니 인생이란, 이름 뒤에 따라올 수식어와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이라는 옷을 입고 나는 생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이라는 옷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삶의 동선을 가늠하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계산한다. 그리고 옷을 장식할 자랑스러운 훈장을 위해 매일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다. 훈장의 질과 양을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겠지만, 값어치를 매기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어떤 훈장을 이름 위에 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우리의 책임이다. 그리하여 그 과정에서는 반드시 우리의 '가치관'이 동원될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아직 자기 이름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타인의 이름마저 침범하려 든다. 그 잔악한 무지함은 때론 이름 안에 존재하는 타인의 '존엄성'까지 무너뜨리며 쾌락만을 향해 간다. 후안무치한 벌거숭이가 따로 없다. 이들은 언젠가 차가운 시선 속에 얼어 죽고 말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정성껏 지은 나의 이름을 유쾌히 불러 주는 주위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나의 이름을 불러 비로소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그들을. 부디 나의 이름이 그대들의 입 속에서 부드럽게 유영하길, 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대들의 마음이 나만큼이나 설레길, 만약 내가 세상에 없다 해도 그대들의 마음속에 내 이름이 영원히 머물길. 그리하여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대들의 마음속에 나라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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