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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신도시의 추억

어쨌든 소중한 걸로-

by 존치즈버거


17살에 나는 처음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 남자 친구의 집은 학교 바로 앞의 아파트였고 나의 집은 학교에서 편도로 50분 걸리는 구시가지의 작은 연립주택이었다. 그 아이는 자기 엄마에게 자주 거짓말을(도서관 다녀올게요...) 하고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을 좋아했고, 나는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다급히 남자 친구를 돌려보내기에 급급했다. 중2 때 쫄딱 망해서 도망치다시피 올라 온 우리 가족이 마련할 수 있었던 보금자리란, 절대 남자 친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 집에서 네 식구가 하하호호 웃으면서 재기를 다짐하고 작은 범죄에도 노출된 적 없이 안전하게 살아온 것이 기적과 같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 아이는 좀 저돌적인 구석이 있어서 어떻게든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싶어 했고 우리는 그것 때문에 자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집이 비는 날에도 절대 부모님이 오늘 안 계셔와 같은 말을 하며 위험한 하이틴 로맨스를 찍을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자 친구는 참 좋은 아이였지만 10대답게 미숙한 구석이 많았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우리 집을 향할 때면 한 터널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 터널을 통과하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행정구역상에도 그랬다. 터널 입구 전은 신시가지였고 터널을 통과하면 구시가지였다. 터널을 통과하면 차도 엄청나게 막히기 시작했는데, 신도시의 넓고 직선적인 도로가 아닌 좁고 언덕이 많은 구시가지의 도로 때문에 혼잡이 발생한 듯했다. 남자 친구가 그때 했던 비슷한 말을 얼마 전 영화 '기생충'에서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냄새가 달라. 냄새가. 터널을 지나면 냄새가 달라져." 나는 당시 그 아이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 말 때문에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올 때도 터널을 통과하면 창문을 열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냄새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밑이 뻥 뚫린 하수구 구멍에서 올라오는 냄새. 신시가지에는 그런 하수구가 없었다. 전봇대도 없었다. 나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다. 90년대 후반 계획된 신도시들에는 전봇대가 없다는 것을. 조망을 해치거나 혐오감을 유발하는 장치나 시설들은 시각적인 위치에 절대 두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고 남자 친구가 나의 재정 상태를 들먹여 나를 깔아보거나 이상한 연민을 갖는 일 따위는 없었다. 다만 그 아이는 평생 한 직장에서 근속하며 무탈한 생을 보낸 아버지와 하루의 시간을 모두 아이에게 투자할 수 있는 어머니를 둔 유복한 가정의 외동아들이었으므로,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무지함이 배려 없는 언어들로 종종 나타나곤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계산을 하며 조건을 따지기엔 서로를 매우 좋아했고 순수했다. 우리는 건실한 청소년들답게 풋풋한 서로의 감정에만 집중했다.


물론 구시가지 아이들과 신시가지 아이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적개심 같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두 곳 모두를 매일 경험한 덕에 나는 그러한 감정들을 느끼는 것에 예민했고 그만큼 공간이 나누는 계급과 취향, 소비행태와 삶의 형식과 그로 인한 가치관 같은 것들 대해 민감한 관찰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새로운 것은 시간을 견디며 낡아갈 수밖에 없다. 말끔한 그 동네의 아파트 외벽들도 군데군데 낡은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지역 구석에 허허벌판 같았던 한 땅에 IT회사들과 큰 백화점이 들어서며 새로운 집값 대항마로 부상하니 그곳은 바로 P. 예전에 우스갯소리로 이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 자신을 도시명으로 부르지 않고 신시가지의 '구'이름으로 부른다더니 이젠 그 구의 P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어디 가서 자신을 행정구역의 '구' 대신 딱 집어서 P에 산다고 부른다고 한다는 농담을 본 적이 있다. 도시는 다시 한번 더 나뉘어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그 신도시나 구시가지를 모두 계층과 계급의 교육 현장으로만 인식한 듯 하지만 사실은 추억이 더 많다. 나는 그 두 곳 모두에서 좋은 친구들과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났으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수월하게 넘겼고 희로애락을 맛보았다. 왕복 2시간이 걸리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이 아침에는 고역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그래도 꽤 괜찮았다.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여전히 그곳에 사는 친구들이 있어 결혼을 하고 경기도의 다른 도시로 이사 온 나는, 지금도 종종 그 애증의 신도시를 들린다. 우리 가족도 흥망성쇠의 다람쥐통을 수없이 돌리며 그곳에 안착했고 지금은 엄마의 작업실만이 거기 남아 있다.


얼마 전 방문한 그 동네의 한 아파트에는 임대주택을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붉은 현수막 위로 임대아파트가 가지고 올 무궁무진한 재앙들에 대해 써놓았는데, 순간 공산주의 국가들의 카미가제식 프로파간다를 직접 대면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사는 곳을 말했을 때 눈살을 찌푸린 친구들은 없었다. 그 아이들은 그저 멀리 살아서 통학하기 힘들겠다거나 주말에 만날 때는 중간지점인 Y역이 좋겠다는 정도의 말을 할 뿐이었다. 그 말 뒤에 부모님이 뭐하시냐거나 그래도 그 동네에서 이 동네로 학교를(딱 중간 수준 학교) 온 걸 보니 공부 욕심이 있다거나(공부 욕심이 없어서 지원한 학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은 다 어른들이었다. 그때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아파트마다 현수막을 내걸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되는 것이 그 현수막의 글씨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나는 조금 더 느리게 자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선정방식의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굳이 그런 식의 상처를 주면서까지 무언가를 쟁취해야 하는 것일까. 그 플래카드 앞에서 나는, 다정한 남자 친구가 내뱉던 그 무지한 말들의 상처를 다시 한번 떠올린다. 나는 확실히 그때보다 더 상처 받고 있는 것 같다. 붉게 펄럭이던 그 단어들은 10대의 무지함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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