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만 기억하는 이야기
나에겐 창작이라는 강렬한 욕구에 불을 지핀 몇몇의 중요한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 강렬함이 '행동'으로 실현되기 전, 잠자고 있던 나의 소질을 간질이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나는 그들을 생의 소소한 은인들이라 부르고 싶다.
고등학교 2학년, 이제 입시라는 불구덩이로 뛰어들기 전 기초 실력을 올리기에 제일 중요한 시기. 일찌감치 수포자가 되고 자퇴를 꿈꾸던 맹랑한 나는, 수많은 문제집을 뒤로하고 수많은 고전들에 눈을 돌렸다.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냥 내 느낌이 그랬다. 아마도 젊은 날의 치기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획일화된 교육 시스템보다는 시간의 풍화에도 낡지 않고 더욱 빛을 내는 고전들에 내 삶의 답이 있을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은 나를 우리 반 독서왕으로 만들었다.
선생님들에 대한 나쁜 기억으로 학창 시절을 안 좋게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시려 노력하는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는 특히 더 그랬다.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임용고시를 치르고 막 담임 선생님이 되신 25살의 파릇파릇한 병아리 선생님이셨다. 엄격한 분이셨지만 젊은 패기답게 열정이 넘치셨다. 학년이 끝날 때는 반 아이들 모두에게 손편지와 작은 선물을 주셨던 기억이 난다.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지만 선생님은 조용히 아이들을 관찰하셨고 편지에는 각자의 특성에 맞는 조언과 칭찬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은 내 편지에 "생각이 많고 깊은 것 같아. 하지만 그만큼 공부도 열심히 한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비록 선생님의 조언을 실현하지 못했지만 아직도 그 편지는 나의 추억이 담긴 기억 상자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내가 우리 반 독서왕이 될 수 있게 학급 문고를 만드신 분이셨다. 아이들에게 일인당 최대 5권씩 기부를 받은 다음 교실 뒤편 사물함에 넣어놓고 읽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담당자는 우리 반 반장이었던 J 양이었다. 동그란 안경테에 타의 모범이 되었던 그 아이는 이상형을 손석희 아나운서라 뽑기도 했다. 책을 빌리려면 J양의 책상으로 가서 문고표에 이름과 빌린 날짜를 기입하면 됐다. 나는 그렇게 반 아이들이 기증한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 J양은 "너 참 책을 좋아하는구나. 네가 우리 반에서 대출 횟수가 제일 많아."라고 말을 했다. 나는 어쩐지 그 말이 마음에 들어 오래오래 그 대화를 주고받은 기억을 곱씹었다. 그 아이 특유의 사려 깊은 어조가 더 마음을 자극했던 것 같다. 2학년 선생님은 우리에게 책 말고도 다른 문화적 양식들을 제공해주셨는데 바로 뮤지컬 <지하철 1호선>과 영화 <헤드윅>이었다. 아직도 그 날이 기억난다. 선생님이 직접 제안한 뮤지컬 관람, 우리의 특별한 야외 수업은 학교가 파한 평일 어느 저녁 이루어졌다. 아마 가을이었을 거다. 쌀쌀한 기운이 맴돌던 대학로 학전극장 앞에 교복을 입고 옹기종기 모였던 우리 반 아이들. 그전에 델라구아다도 보았고 동생을 데리고 어린이 연극을 보기도 했지만 오랜 전통과 네임드가 있는 뮤지컬은 그게 처음이었다. 불이 꺼지고 숨을 죽이자 여러 명의 배우가 무대에 올랐다. 새롭지만 공감 가는 이야기, 그리고 음악과 노래들. 나는 12살에 이승환 콘서트를 처음 관람했을 때 느꼈던 희열을 다시금 느끼며 관람이 끝난 후에도 흥분을 가라 앉힐 수 없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좋은 공연을 보면서 삶의 시야를 넓힐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2학년이 끝나던 무렵, 선생님은 방학을 앞두고 해이해진 분위기를 다독이며 비디오 한 편을 보여주셨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헤비한 락이 즐비하는 <헤드윅> 은 흥미를 넘어서 기분 좋은 충격을 주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에 호기심을 갖길 바라셨던 것 같다. 물론 수업 시간에도 몰래 책을 읽느라 혼을 나기도 했지만 혼을 내면서도 부지런히 책 읽는 나를 이해한다는 웃음을 짓던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첫사랑과의 이별로 마음속에 멈추지 않는 풍랑을 장착하고 살았던 고등학교 3학년. 다행히 일찍 진로를 정하고 그에 준하는 자격 요건을 갖춘 덕에 나는 좀 헐렁한 고3을 보냈다. 아이들은 나의 여유를 부러워하면서도 질투를 했는데, 후에 나는 일찌감치 빌린 나의 여유에 대한 이자를 갚듯 고3보다 더 '빡센'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부담감 때문인지 학교 생활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교실은 엄습한 긴장과 그래도 학생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여느 학년과는 다르게 스트레스도 넘쳤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좋았다.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이었지만 반은 남녀가 따로 분반되어있었는데 보통 여자 선생님이 여자반을, 남자 선생님이 남자반을 맡은 기존의 관행과는 다르게 우리 여자반 담임 선생님은 남자분이셨다. 나는 처음 반을 배정받고 쾌재를 불렀는데 그건 선생님 때문이었다. 동그란 안경에 커다란 두 눈,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아이들이 식겁할 정도로 혼은 내도 꼭 마음을 다독이는 말 한마디를 남겨주시던, 정치가 왜 우리 삶에 중요한 문제이며 이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 일인지 알려주신 사회과목 선생님. 나는 고2 때 경제 시간에 그분을 처음 보았고 완전 홀딱 빠져버렸다. 물론 선생님은 인기가 많았다. 수업 시간마다 가끔 유머러스한 매력을 뽐내시며 아이들의 웃음을 이끌어 내셨으니까. 아쉽게도(?) 결혼해서 아들이 있는 분이었고 선생님의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익'자로 끝나는 돌림자에 맞춰 이름을 지어야 하는 고민을 함께 나누기도 하셨다. 나는 스승의 날 일주일 전부터 고민을 거듭하다 수줍게 책 한 권과 카네이션을 선물해드렸었다. 언급했다시피 나는 절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성적이 좋은 학생이 아니었다. 수학 같은 경우는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는 골프부의 평균보다 낮았다. 진짜 나 자신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때 뭘 믿고 이렇게 공부를 안 했나 싶을 정도로 성적은 바닥이었다. 진로 상담 시간에 선생님은 나의 계획을 들으시고는 말씀이 없으셨다. "그래, 니 알아서 잘하겠지." 그리고 학기가 마무리될 때쯤, 필요한 서류를 받기 위해 교무실을 찾았을 때 선생님은 특유의 사투리 섞인 말투로 말씀하셨다. "내도 지금 혼자 일본어 공부하거든. 1급 볼라 하는데 와 진짜 어렵대. 니도 그동안 공부하느라 힘들었제? 잘해봐라. 잘 되겠지. 넌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깊어서 그쪽으로 나가도 좋을 것 같네." 나는 볼이 빨개져 교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반 친구 몇 명과 함께 선생님을 다시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셨고 "와, 니 진짜 아가씨가 다 됐네. 고등학교 때랑 정말 다르데이. 잘 컸네."라며 대견해하셨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야구장에서 경기를 보던 중, 외국인 선수였던 데이브 힐튼 선수가 2루타를 치는 순간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굉장히 쿨한 일화다. 하지만 하루키가 방망이가 볼을 치는 경쾌한 소리와 날아가는 공만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 리 없다. 나도 작가를 꿈꾸게 된 이유를 누가 물으면 어느 날 문득 글이 내게로 왔어요, 같은 감성적인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글이 그렇게 내게로 올 때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소한 말들이 있었고 그 말을 듣고 난 후의 나의 생각들이 있었다. 그 말들과 생각이 몸집을 불려 작가라는 거부할 수 없는 큰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그러니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자. 내가 한 어떤 사소한 말이 어쩌면 그의 인생에 꿈을 확신할 2루타가 될 수 있다고. 내가 그 사람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겠지만, 결정적인 힌트를 주게 될지는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불쑥 나오는 말은 배려있고 삼키는 말은 애꿎은 상처를 만들지 않을까. 뭐 이런 작은 바람을 가지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