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행위를 위해선 우리가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은 도구 앞에 가만히 앉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그 도구는 달라진다. 연필일 수도 있고 볼펜일 수도 있고 나처럼 노트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도구가 어떻든 글을 쓰는 사람은 생각한다. 생각하고 자기 안의 말을 글씨의 형태로 쏟아낸다. 그리고 멈춘다.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쓴다. 초고가 완성되면 읽는다. 그리고 고친다. 이 과정을 전문용어로 퇴고라 한다. 고치는 과정에서도 생각은 반복된다. 몸은 여전히 도구 앞에 머문다. 김연수 작가는 이 과정을 토고라고 하지 않았던가. 토가 나올 만큼 퇴고를 반복하기 때문에. 초고는 고초의 시작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 글을 쓰는 사람들은 변태일지도 모른다. 자기 혼자 고초의 씨앗을 심고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토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가성비 떨어지고 스스로의 지적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행위인데도 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것을 즐겼다. 생각을 하기 위해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어른들은 좀 움직이라는 권유를 늘 했다. 하지만 '생각'을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누구보다 바쁜 머릿속을 위해 몸이라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공상에 시달리기보다는 공상을 즐기는 쪽이었다. 나만의 세계를 유영하다 보니 현실에서는 언제나 실수가 따랐다. 앞에 있는 물건을 보지 못한다던가 지우개를 입에 넣고 초콜릿으로 공책을 문지른다던가. 하지만 생각을 멈추는 것은 추리 영화를 보며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객석을 떠나는 일과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 생각이 나를 먹고 몸을 불리는 것인지 내가 생각을 먹고 자란 것인지 모르게 나는 생각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키를 재며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여전히 생각을 한다.
사용자의 성향에 맞게 큐레이션 되는 여러 인터넷 사이트들. 나 또한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기술의 혜택을 온몸으로 톡톡히 느끼며 새로운 기능들을 재주껏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무섭다. 비대한 정보에 허덕이는 뇌를 큐레이션에 의지해도 좋은지, 정말 큐레이션의 작동 방식은 우리를 선별된 정보의 세계로 인도하는지. 종종 등장하는 음모처럼 단정하게 정련된 카테고리 뒤에 어떤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걱정이 들 때면 나는 책을 펴 든다. 나만의 안목으로 내가 직접 정한 책들을 읽고 있다 보면 비로소 내가 과정 없이 즉각적인 인풋과 아웃풋만을 강요당하는 '21세기 기계형 인간'에서 벗어나 비로소 무지와 가능성을 깨닫는 사람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걱정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편리함만큼 그 손쉬운 과정이 '사유'라는 생각의 핵심을 지워버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유형의 사람을 본다. 어떤 대상에 대해 자신이 획득한 정보를 기계처럼 읊어대는 사람들. 지식의 화수분처럼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들. 물론 그 지식을 자기의 언어로 내뱉기 위해 그들은 많은 시간을 정보 습득에 할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는 지식백과처럼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만 할 뿐,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생각'을 생략한다. 그러니까 그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역사적이며 인문학적인 정보들을 말할 뿐 그것에 대한 자신만의 사유와 관점 그리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대중이 매우 열광하는 유명인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해박한 지식은 사려 깊은 태도로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지만 철학과 사유로 무장한 날카로움으로 지식 너머를 말하는, 또 다른 명사 앞에서 금세 기가 죽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과학의 발달로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지만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에겐 상상력이 있다. 생각하는 힘이 있다. 그러니 드래그된 정보를 컨트롤씨(Ctrl+C) 컨트롤브이(Ctrl+V) 하듯, 뇌 속에 붙여 넣기만 하지 말자. 행간을 곱씹고 문맥을 파악하자. 인간에게는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란 맥락이 존재하는 서사가 아닌가. 과학은 가정에서 출발한다. 가정은 결론을 말하기 전 임시로 정하는 전제이다. 누군가 새로운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가정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안락하게 누리는 편리한 시스템들도 단순히 자본의 거대한 투입만이 아닌 개발자의 고민이 있기에 가능한 일임을 생각해보자.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신문기사에도 생각은 필요하다. 언론과 기자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에 전문성에 기 눌리지 말고 나 스스로 검증하는 일도 필요하다. 진실의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누군가 떠먹여 주는 정보만을 섭취하면 탈이 난다. 가치관의 왜곡이 생겨버린다. 설령 나의 지금 생각이 틀리다 해도 괜찮다. 상상력을 동반한 가정은 언제나 수정될 수 있으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일에도 생각은 필요하다.
우리가 무궁무진한 사유의 바다를 무한히 헤엄치는 조오련이 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가질 수 있다, 부표를. 암초와 침선의 존재를 알리며 안전한 뱃길을 가리키는 존재. 우리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와 편견들에 잠식되지 않고 우리를 지혜의 보고가 기다리는 육지로 인도할 지표. 부표의 사슬을 단단히 묶기 위해서 우리는 관찰하고 생각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 글을 쓰는 사람이 도구 앞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다 해도 너무 나무라진 말자. 그는 지금 생각의 바다를 항해 중일 테니. 그가 갑자기 알 수 없는 탄성을 내질러도 너무 놀라진 말자. 그는 아마 미처 예감하지 못한 거대한 풍랑을 만나 전투 중일 테니. 그가 불현듯 책상에 머리를 박거나 스스로를 욕해도 너무 안쓰러워 말자. 그럴 땐 그저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스트레칭을 권유하면 된다. 그는 우두커니 앉아 세월을 허비하고 있는 듯 보일 테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바쁜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을 끝냈을 때 그는 누구보다 생생한 눈빛을 가지게 될 것이다. 생각을 하자. 누군가 입 속으로 들이밀어 불쾌한 포만감을 주는 지식보단 생각의 바다를 항해하며 내 손으로 걷어 올린 미역 한 줄기가 더 보람을 주지 않는가. 그러니 부디, 일상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가끔 책상에 앞에 가만히 내 안을 응시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