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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울어주는 사람

어쩌면 아주 개인적인 감정

by 존치즈버거


흔히 시인을 가리켜 슬픈 세상을 대신해 울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삶의 균열과 고통, 좌절과 죽음처럼 익히 알고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시인은 가만히 들여다본다. 개인적일 수도 있고 인류 보편적일 수도 있고 시 안에 담긴 스타일은 저마다 달라도 삶과 인간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엔 시인 각자의 관점이 있다. 그러한 자기만의 관점을 형성하기 위해 시인은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의 내면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아마 누구보다 치열하게 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시인을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연일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과 사고와 그에 달리는 무수한 댓글들만 접해도 앉은자리에서 에너지가 모두 소모되어 심정적 허기를 느끼는 세상이니 말이다. 누구보다 치밀하게 상의 본질을 뚫어 그 밑에 도사리는 진실들을 봐야 하는 시인들을 떠올리며, 흔히 가녀린 손마디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뿔테 안경에 고뇌 가득한 얼굴일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은 어쩌면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나는 시인을 떠올리면 항상 제주 해녀들이 생각난다. 자신의 분수만큼 숨을 참고 바다 밑으로 끝없이 들어가 맨눈으로 바닥을 본다. 시인도 그처럼 자신의 재주껏 생의 모든 자극과 활기를 헤치고 진실의 저 밑바닥으로 헤엄쳐 이미지와 문장을 캐오는 사람들이라는 생각. 둘 다 캐는 것은 양식이라는 점에서 같다. 하나는 직접적인 먹거리이며 시인의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음의 양식이다.


인류의 재앙이 너무 많이 알아버린 것에서 온다는 말처럼 결국 시인들도 너무 많은 감정을 알아버려서 타인의 고통이 스치기만 해도 그 아픔을 알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사실 누군가를 대신해 울어준다는 것이 말이 쉽지 보통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조선시대에는 품삯을 받고 대신 울어주는 곡비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하고 대만이나 태국 같은 나라에는 아직도 장례식에서 돈을 받고 울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 않나?


나는 어릴 적에는 사람이랑 눈만 마주치면 울어버리는 통에 부모님이 고생이 많으셨단 이야기를 아직도 듣는다. 징글징글할 정도로 울어버린 아이라 징글징글할 정도로 그에 관한 부모님의 푸념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성장하면서는 그 눈물이 쏙 말라 버렸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기 보다는 눈물을 참는 쪽에 가까운데, 내가 무언가에 영향을 받아 마음이 연약해졌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이상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초연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울지 않는 아이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울음은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는데 남자 친구와 싸우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거나 감정적 대응이 지칠 때 면피용으로 활용되고 만 것이다. 눈물의 그릇된 사용으로 정작 울어야 할 상황에서는 어색하게 웃는 이상한 사람이 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나도 어느 순간 눈물을 펑펑 흘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눈물은, 낯 가리느라 흘렸던 유아 시절의 눈물도 감정적 대치를 견디지 못한 스트레스성 눈물도 남자 친구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차이고 흘리던 히스테릭한 눈물도 아닌,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다.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014년 4월이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에 진학해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던 내게 아이는 계획에 없던 선물이었다. 남편과 나는 언젠가는 아이를 갖겠지만 그것이 당장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전혀 준비도 안되어 있었지만 이상하게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을 보는 순간 흥분이 밀려왔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거운 마음으로 아이를 낳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처음 산전 검사를 받고 나온 날, 나는 세월호에 탄 학생들이 전원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마 나뿐만이 아닌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날의 충격은 멍하게 내 머리를 때렸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 충격은 반복되었다.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것 또한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겪은 일이며, 그것은 이제 한국사에 고통스럽게 자리할 거대한 트라우마가 되었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며 느낀 희망과 꿈. 그러나 뉴스에 등장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꿈은커녕,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한 채 끝없는 의혹과 모욕에 시달린 사람들의 설움과 고통, 분노만이 존재했다. 이것에 관련된 말을 하기만 해도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나는 이 당시 인간에 대해 엄청난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입에 달고 다닌 말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야.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 기차를 멈출 방법을 의논하는 대신 누가 자리를 더 많이 차지하고 누가 화장실을 오래 사용하는지 같은 바보 같은 일들로 싸우고 있어." 진심이었다. 유가족들의 고통이 깊어지고 이런 생각들이 반복될수록 뱃속의 아이에게 미안했다. 무책임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이런 엉망진창인 세상에 아이를 낳아 잘 키울 자신이 있을까, 이 거시적인 불안은 나라는 개인의 자존감마저 소외시켰다.


유가족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대중의 감정은 무뎌졌다. 그리고 극적으로 이어진 탄핵과 그로 인해 수면으로 드러난 진실들. 영화에서는 진실이 밝혀지며 속이 후련한 카타르시스가 있지만 세월호의 진실은 아직 반의 반도 밝혀지지 않았다. 아이들의 유해도 모두 수습되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아이를 낳고 육아라는 전쟁 속에서도 행복과 기쁨을 맛보는 능숙한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이제 개인 침대를 가지고 아침까지 쭉 수면을 취하는 동안, 나는 여전히 세월호를, 그 아이들을, 유가족이 당한 수모와 그들에게 아무렇게나 말한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가끔 밤에 혼자 운다. 전혀 극복이 안 된다. 한데, 맘 놓고 우는 것도 어쩌면 사치일 수 있겠다,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해 급하게 눈물을 훔친다. 어디선가 아이들이 죽고, 그것도 자기 부모에게 맞아서 죽고, 끝없는 폭력과 기만과 모욕과 조롱들.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진실을 알기 위해 평범한 한 명의 시민으로서 노력을 시작하자 이 세상천지가 울 일이 너무 많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나에게는 일어나지도 않은 그 일들을 위해 말이다. 그것이 진짜 '위함'인지 그저 나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것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눈물의 경계를 따지기엔 고통이 너무 크다.


함부로 말하고 너무 쉽게 판단하고 그러면서 쉽게 잊고. 생각하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신념들을 무작정 믿고, 사유 없이, 그저 암기된 지식으로 무장하고, 진리를 거부하고, 진실을 재단하고, 비웃고, 약자에게만 화내고, 구태의연한 냉소만을 무기로 삼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극적인 도덕성을 강요하고, 권력에 의지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산다고 자위하고. 반복의 반복. 그리고 또 너무 함부로 말하고 후회하고 다시 쉽게 잊고. 이런 반복들이 괴롭다.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순진하다 말하는 대신 '나이브'라는 외래어로 순화시킨 충고를 건넨다. 남의 일에 매일 쏟아지는 기사에 일일이 신경을 쏟고 반응하는 것보다 더 좋은 쪽에 에너지를 쏟으라고. 그것이 나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그러면 행복이 뭘까? 내가 웃는 사이 누군가는 고통받고 자신이 행한 것 이상으로 지탄받으며 억울하게 내몰리는 상황에서 나는 어떤 다른 행복을 찾아야 하는 걸까? 그런 행복이 진짜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러니 우리가 시인이 되지는 못하고 우리가 운다고 누가 돈을 주거나 그 눈물을 치하하지도 않지만 나는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우는 내가 한 번쯤은 되어보자고 말하고 싶다. 사실 이것은 매우 이기적인 방법이다. 고통을 씻어내는 아주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방법. 나는 눈물을 흘리고 충격을 털면 끝이지만 사건의 당사자들은 눈물 조차 말라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한 번은 누군가를 대신해 울어주자는 말을 또 한 번 해본다.


우리가 누군가를 대신해 울어주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눈물이 난다고 해서 괜스레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나이가 들어서라고, 호르몬 때문이라는 싱거운 변명은 하지 말자. 누군가의 마음에 공감한다면 그냥 한바탕 울어주고 말자. 그런 일을 한다고 밥을 먹여주니 돈이 나오니 세상이 변하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램프 속의 지니처럼 순식간에 우리를 마법의 장소로 데려가진 못하지만, 때로는 그런 바보 같은 수고가 모여 거대한 힘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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