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하기는 옷차림에서만!
누군가 나의 삶에 대해 단정 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의 사건만을 두고서, 그것이 마치 그 사람의 전부인양.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이런 실수를 반복한다. 나는 이것이 무지에 의한 폭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쉽게도, 정작 판단 내리는 사람들은 그것이 '폭력'인지도 자신이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그럴 때가 있다. 내가 모르거나 접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 나름의 논리를 증거로 내놓기는 하지만, 그걸 확신할 수 있는 경험은 전무하면서도 말이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쉽게 툭 내뱉고 마는 말들.
다만 고무적인 일이라면 그런 논리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해석이라는 점을 반드시 스스로에게 고지하고 절대 타인에게 주지 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내가 본 사건이나 상황들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진실을 말하기 전까지는 내 안에서만 말할 뿐 침묵을 지키려 애쓴다. 이것을 철학용어인 에포케라 부른다면 너무 거창하려나. 처음부터 그러진 못 했다. 나 또한 타인에 의해 상처 받으며 역지사지를 배운 것이다. 내가 완벽한 태도를 가졌다 할 수는 없다. 나도 여전히 노력 중이다.
종종 권위와 직함을 가진 소위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티브이에 나와 분야를 초월해 사건에 대해 무분별한 해석을 늘어놓는 것을 본다. 시청률을 위한 방송사의 전략인지 아니면 그들이 지식을 넘어서 타인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초능력이 존재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그러한 논평은 비일비재하고 따분할 정도다. 나는 그것이 매우 비교육적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마치 우리에게 어떤 방면의 전문적 학위만 주어지면 진실에 대해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자격이 검증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에 주저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린 답이 될까 조바심 내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권위자들의 권리가 남용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왜곡 없이 '사실'만을 보도해야 하며, 시민의 판단력을 흐리는 검증되지 않은 기사를 써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지닌 언론들도 저러니,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포털의 헤드라인에 기대는 우리들이 객관적 견해로 사건과 사람을 말하는 것은 더 어려울지 모른다. 진실을 본다는 것은 두렵다. 나와 상관없는 잔인한 사건이라 해도 그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다 보면, 비슷한 경험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니까. 더군다나 특정 사건의 고통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고 방치되는 과정을 오래 지켜봐야 한다면,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와 마음과 다르게 진실을 회피하게 된다. 아무래도 여유가 없는 사회 아닌가. 아무리 일해도 풍요는 요원하고 취업이며 결혼이며 순리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인데, 엄밀하게 사건의 실체를 들여다 보라는 주문은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쉽게 말하기 이전에 이런 생각쯤은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저 복잡하고 거대한 사건 뒤에 '사람'이 있다는 생각.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만큼 자극적인 사건들은 더욱 '대상'으로서만 인식되는 것 같다. 아무리 사건의 파일명에 피해자의 이름이 들어간다 해도 그것이 입과 입을 오르내리다 보면 사건명에 깃든 누군가의 이름 또한 이미지나 가십처럼 느껴지고 만다. 거대한 사건일수록 그사이에 낀 기업이나 거물급 정치인 혹은 치정과 살인이라는 소재들이 우리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런 사건을 만드는 주체도 피해자도 결국 '사람'이다. 죄의 유무를 떠나 사건을 사건 자체만으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가끔 판단을 보류하고 진실의 맨 얼굴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사람. 우리가 어떤 사건과 삶 그리고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특히 언론에 의해 뭉뚱그려진 한 덩어리의 이야기라고 느낄 때에도 다만 30초만이라도 이런 생각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저 너머의 사람이 있다!' 개인의 단순한 판단이 무슨 영향을 주겠냐고 하지만, 작은 비늘이라는 뜻의 왜곡된 '편린'들이 모이면 그것이 바로 여론이라는 거대한 한 마리의 용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스치듯 한 번이라도 좋으니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사건이 가로막은 장벽 뒤에 홀로 그 모든 오해와 의혹과 진실을 떠안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비난은 진실 후에 이뤄져도 좋다. 지금 여기는, 누군가 죄를 지었다면 명명백백히 밝혀 죗값을 물어도 좋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가. 그러니 부디, 그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우리의 입으로써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없기를. 그리고 만약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단죄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진실을 보는 눈으로 날카롭게 외쳐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맹렬히 비난해야 할 입이 있다면 그러한 부정에 마음껏 쓰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