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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질문

by 존치즈버거


행복하세요? 혹은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 오래된 질문은 유명인사의 인터뷰 말미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질문이다. 아마도 행복에 대한 기준을 통해 그 사람의 현재 위치와 가치관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벼운 술자리나 잡담이 난무하는 친구와의 대화에도 이 질문은 종종 등장한다. 고단한 과정을 거친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는 우회적인 물음일 수도 있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 행복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일 수도 있다.


놀랍게도 나는 이 질문을 통해 똑같은 대답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저마다 다른 인생이 존재하듯 사람들이 내놓는 답은 각양각색이다. 다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오랜 다툼을 위한 최선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와 같은 복잡한 질문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말하기 전 조금 머뭇거린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나도 그렇다. 행복하냐 혹은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간단한 질문에 우선 내미는 것은 침묵이다. 그리고 생각.


생각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정의를 떠올리는 것,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 사건의 이면을 짐작하는 것, 상황을 가정하는 것.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하는 생각은 아마도 '반추'일 것이다. 반추란 동물이 자신이 먹은 것을 다시 게워 씹는 일을 가리키는 뜻이며,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며 생각하는 일을 말한다. 행복을 말하기 위한 반추란, 가깝게는 어제를 떠올리는 일이며 멀게는 지금 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일의 근원을 찾는 일이다. 즉, 과거라는 이름으로 소화된 기억을 다시금 게워내어 지금의 감각으로 음미하는 일. 나의 행불행을 짐작하게 만드는 어떤 일의 시작점부터 지금까지를 돌아본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즐거움이나 기쁨이 과반에 가깝다면 우리는 비로소 '아, 나는 지금 행복해'라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식상한 질문을 받는 것도 던지는 것도 좋아한다. 이 질문을 받으면 비로소 인생 전체를 한 번 뒤돌아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미시적으로만 보던 인생사를 세계지도 바라보듯 쭉 펼쳐 놓고 찬찬히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위도와 경도를 짐작하는 것처럼.


사실 우리가 현재 어떠한 특정적인 이유로 인해 행복하다 말하면 그것은 인생 전체를 비추어 느끼는 충족감보다는 찰나의 감정에 가깝다. 기쁨이나 즐거움, 쾌락과 흥분을 행복이라는 말로 대체한 것이 된다. 그래서 이 행복은 그 일이 끝나고 흥분의 소강상태를 맞이하면 다시 사라질 수 있는 일종의 분위기라는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은 행복하지만 앞으로는 알 수 없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행복감을 느끼는 일은 그 사건이 종결되면 사라지고 마니까.


가령 내가 오래도록 짝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고백을 받아주었다고 치자. 우리는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감에 푹 젖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감은 연애를 하는 과정 속에서 점점 잊히게 된다. 좋아하는 남자의 취업 여부와 그를 둘러싼 인간관계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나의 상황들. 이러한 조건들에 우리는 수없이 흔들리며 여한 없던 행복의 순간들이 무색하게 방황하게 된다. 짜증 한 번 없이 행복감만을 느끼고 있다 말한다면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연애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경우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다고 해도 무한한 행복만을 느낄 수는 없다. 그게 방탄소년단이라 해도 그렇다. 노력에 대한 보상을 무한히 받고 있는 요즘도 그들 마음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번민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인생이지 않나.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명확한 기준도 없고 아무래도 알 수 없어 역사 속에 끊임없이 질문처럼 던져지는, 이 추상적인 단어가 사실은 그 무엇보다 우리의 현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이다.


그러니 '행복이 무엇인가요?'라는, 5살 아이도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단순한 질문이 사실은 엄청나게 복잡한 메커니즘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머뭇거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이라는 것은 결국 답이 없는 물음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비로소 반추하는 나의 삶. 그 삶에는 절대 만족감과 성취감만이 자리한 것은 아니다. 실패와 좌절이 되풀이되었고 그것을 이기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 어떤 상처는 까맣게 잊었고 어떤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나에게 고통을 준다. 그럼에도 묵묵히 삶을 살았고 고난 중에도 기쁨을 맛본다. 어쩌면 행복을 말한다는 것은, 그런 나의 삶을 거대하게 관통하여 희망의 무게를 달아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가끔은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듯이 먼지 묻은 이 오래된 질문을 선물처럼 꺼내보자. 스스로에게 혹은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질문에 답하기 위해 뒤적거린 기억의 서랍 속에서 잊고 있던 소중한 순간들이 마냥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반대로 지금 불행하다 말하는 사람에게 설탕 한 스푼의 작은 용기라도 보태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매번 좋은 답을 기대할 수 없다. 누군가는 그 질문에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행복을 '나부랭이' 취급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손을 따스하게 맞잡고 이렇게 말하면 된다. "부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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