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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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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Mar 20. 2022

아무것, 아무것도 아닌 것 4.

4화. 말 한마디의 상처

아무것, 아무것도 아닌 것(Something & Nothingness)          

4화. 말 한마디의 상처


1.

자가격리 3일째. 보미는 이제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인가. 주말 레슨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서 침대와 책상 사이만을 오갔다. 무용을 시작하고 2년 동안 이렇게 평화로운 주말을 맞이해본 적이 있었나, 생각하며 레슨을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상황이 나름 행복했다. 가지 않을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보미는 하루 종일 몽글몽글 구름 위에서 신선놀음을 하듯이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커피백스치노가 너무 먹고 싶었다. 커피백스치노를 사다 달라고 엄마에게 문자를 남겼다.

 

디디 리리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다. 보미는 생글 벙글 웃으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엄마는 양손에 짐이 한가득이다. 순간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에 불안이 기습했다. 짐도 많은데 오는 길에 음료까지 사다 달라했으니 마지못해 내 부탁을 들어주면서 엄가 혹시나 날 한심하다 하지는 않았을까. 엄마는 숨을 헉헉거리며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식은땀이라니. 어디 아픈 건가? 엄마 안색을 살피며 보미는 맘이 쓰였다.  

들어오자마자 엄마는 쓰레기 분리수거함을 다 꺼내어 분류하고 일반쓰레기 통을 비워 쓰레기봉투에 담고 분주하게 청소를 했다. 아빠가 있을 때는 분리수거하고 쓰레기 내다 버리는 것은 죄다 아빠 몫이었는데, 이제는 엄마가 모든 걸 다 해야 한다. 아빠가 할 때는 미안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엄마가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볼 때면 보미는 마음이 무겁다. 보미는 '내가 할게' 하려다가 아참, 나 밖에 못 나가지, 라는 생각에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자기 방의 쓰레기들을 현관 앞으로 내다 놓았다.

쓰레기들을 다 내다 버리고 들어온 엄마는 기진맥진 탈진한 사람 같다. 엄마는 힘쓰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힘쓰는 일은 아빠랑 언니가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엄마도 나도 힘쓰는 일은 잘하지 못하니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할 때면 아빠랑 언니가 그립다. 같이 있을 땐 나랑 스타일이 달라서 성가시고 짜증 나게 하는 일도 많았는데, 이제 옆에 없으니 아쉬울 때도 많다. 언니랑 아빠가 떠나고 엄마랑 단 둘이서 보내는 이 생활이 마냥 좋기만 했었는데, 좋기만 한 것은 없는 걸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 삶의 이치인 걸까.

 

2.

미숙은 저녁 산책을 나가고 싶었으나 기력이 없다. 잠시 누워서 쉰다고 한 것이 스르르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창밖에는 어둠이 깔리고 커튼 뒤로 한밤 중의 고요와 정적이 흐르는 듯했다. 초저녁 잠에서 깨어났으니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듯. 뒤척이다 일어나 전등을 켜고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누워서 건성으로 책을 보고 있는데 보미가 조심스레 노크하고 들어왔다.

“엄마, 많이 힘들어?”

“괜찮아. 들어와.”

“있잖아.... 드라이기가.... 갑자기 퍽하고 으앙.....”

울먹울먹 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보미는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다. 드라이기 전원이 나가면서 퓨즈가 터져버린 것이었다. 보미의 손가락에 까맣게 탄 자국이 남아있다.

“아이우, 어째? 어디 다치진 않았어? ”

“응, 난 괜찮아.”

보미의 방으로 달려가 보니 드라이기 연결선 부분에 테이프로 붙인 부분이 불에 탄 흔적이 보이고 퓨즈 타는 냄새가 방안에 고여 있었다.

“아이우, 망가졌네. 큰일 날 뻔했잖아? 새로 하나 사자. 엄마가 다시 사자고 했잖아?”

미숙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보미의 얼굴이 냉랭해졌다. 보미는 갑자기 울먹이던 울음을 멈추고 냉정해지더니 "알았어"하고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미숙은 보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차,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정신을 차렸다.

“너 탓하는 거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냥 이 일이 벌어진 거잖아. 이렇게 됐으니까 이제 어쩔 수 없지.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네 잘못이라고 하는 게 아니야.”

아무리 변명해보지만, 보미는 얼음 공주의 얼굴로 여전히 목소리가 냉랭하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엄마도 힘든데. 엄마 힘든데, 내가 엄마를 힘들게 했네. 가서 쉬어.”

미숙은 괜찮다는 말을 연거푸 말하며 보미의 등을 도닥여보지만 보미의 마음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며칠 전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다가 보미는 엄마에게 달려와 징징거리며 하소연했다. 드라이가 바람이 나오다가 멈추고, 나오다가 멈추고, 자꾸 그래서 짜증이 난다고 투덜거렸다. 미숙이 전선 연결 부분이 접촉이 잘 안 돼서 그런가 보다, 전선을 매만져주니 작동이 되었다. 전선이 꼬이면 작동이 멈추었다가 전선을 잘 연결해주면 다시 작동이 되기를 반복했다. 이리저리 해보다가 미숙은 새로 하나 사자고 했다. 보미가 인터넷 주문하겠다고 해서 잊고 있었는데, 보미는 작동이 되다 안되다 하는 드라이기를 검정테이프를 붙여놓고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사자고 했는데, 아직 사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보미는 자신을 탓하는 말로 들었을 것이다. 맞다. 미숙은 보미 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의식 저장고에는 남 탓하는 습성이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괜스레 남 탓하게 되는 자신의 고질적인 사고 패턴을 미숙은 익히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너마저 나를 힘들게 하냐는 마음, 남 탓하고 원망하는 습성이 의식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의식적으로 불쑥 말 한마디로 튀어나온 것이다.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감당해야 하는 것이 짜증 나고 버거울 때면 어김없이 발동하게 되는 탓하고 원망하게 되는 이 습성은 언제면 사라질까. 휴!!! 미숙은 지겹다는 생각을 하며 가슴속으로만 깊은 한숨을 내 쉰다.


주워 담지 못할 한 마디의 실수를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찌하랴. 미숙이 내일 사다 주겠다고 말하고 이제 그만 자라고 일어서려는데 보미가 말했다.      

"머리 말려야 하는데. 머리 안 말리고 어떻게 자? 나 머리 안 말리고 못 자는 거 엄마도 알잖아."

보미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면서 건조하게 내뱉은 말이지만, 이 말 한마디에 미숙은 와르르 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럼 지금 이 시간에 날 보고 어떻게 하라고, 울부짖고 싶었다.

"그럼 지금 이 시간에 어떻게 할 건데? 어쩔 수가 없잖아? 그냥 자연바람으로 말려야지."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듯이 알겠다고 말은 하는데도 미숙은 보미의 냉랭한 말투가 거슬려 신경이 계속 쓰인다.

"지금 몇 시야?" 

 "8시쯤?"

아아 초저녁이구나, 자다가 깬 미숙은 한밤중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초저녁이었던 것이다. 미숙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방으로 가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엄마가 나가서 사 올게. 하나 사다 줄게."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는데 보미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냐, 엄마 괜찮아. 나 그냥 괜찮아. 엄마 힘들잖아. 엄마 쉬어."

순간 피로가 몰려오면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서 눈을 감았다. 지난 3일간의 피로가 몰려오면서 미숙은 혼잣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엄마도 힘들다!!'

방안에 들어와 미숙은 불을 끄고 바닥에 엎드렸다. 쿠션을 베개 삼아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카톡 알람에 얼굴을 들었다. 보미의 자가격리 소식을 들은 민철이 괜찮냐고 안부를 묻고 있었다. 민철의 카톡에 답을 하려다가 말고 미숙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 눈물의 파도가 온몸을 집어삼킬 듯이 밀려드는 것을 보았다. 엄마의 길, 엄마의 자리가 버겁다, 무엇이 그토록 서러운 건지, 꺼이꺼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서러운 눈물이 솟구쳐 솟아올랐다. 불쑥 내뱉은 말 한마디로 겪어야 했던 감정에너지가 너무나 크고 무겁다. 왜 가볍게 훌훌 털어내지 못하고 이렇게 무겁게 받아 안고 있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엄마의 삶을 홀가분하게 살아낼 수는 없는가. 미숙은 어둠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목놓아 하염없이 울다가 잠이 들었다.           


미숙이 보미를 데리고 지금 이 아파트로 이사한 지 일 년 육 개월. 오랜 별거 끝에 미숙은 민철과 이혼에 합의했다. 민철은 고향으로 떠났고 큰딸 새미는 대학 진학하면서 원룸을 구해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작년부터 미숙과 보미, 둘만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었다. 미숙과 보미는 예민하다. 겁도 많다. 조그만 일에도 불안하고 소심하다. 맘은 한없이 여리고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는다. 민철과 새미에게는 별 거 아닌 사소한 일도 미숙과 보미에게는 버겁고 힘들 때가 많다. 민철에게는, 새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미숙과 보미에게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시인 안도현이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라고 하듯이 미숙과 보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태산을 휩쓸듯이 강물이 몰아칠 때가 있다.     


침묵 속에서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 안도현의 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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