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유주얼 May 14. 2020

[공모전 당선작]서지인_나도 내가 집순이인 줄 알았어

[에세이] 완벽한 칩거 라이프를 보여 준 올드보이상


방구석 공모전 당선작 에세이 부문 / 올드보이
15년간 방에 갇혀 군만두만 먹은 <올드보이> 최민식의 뒤를 잇는,

생생한 칩거 라이프에 유머까지 가미한 작품에 주어지는 상입니다. 


나도 내가 집순이인 줄 알았어

글_ 서지인


  집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내가 지겨워 이별을 고한 J야, 미안하다. 나도 내가 집순이인 줄 알았어.     


  안녕, J야. 잘 지내니? 밖에 나돌기 좋아하는 네가 집에만 갇힌 심정은 어떨지… 그다지 궁금하진 않네. 난 두 달째 집에서 칩거 중이야. 우리 만날 때마다 네가 항상 했던 말, 기억하니? “너, 계속 집에만 있는 거 진짜 별로다?” 그래, 네가 맞았어. 집에만 있는 건 진짜 별로야.     


  방음이 더럽게 안 되는 집에 사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짜증나는 일이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은 다이어트 댄스 학원이랑 마주 보고 있는데, 2분 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두 개나 있고, 바로 아래층엔 치킨집이 있어. 여기서 중요한 건 ‘다이어트 댄스 학원’이야. 다이어트 댄스 학원이 일반 댄스 학원과 같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인 게, 모든 노래가 기본 1.5배에서 2배 정도 빠른데다가, 노래방에서 디스코, 테크노 하여튼 여러 장르를 리믹스한 것 같은 노래들이 50분 동안 나와.     

  

  그래서 난 나름 복수랍시고 블루투스 마이크를 샀어. 그걸로 내가 좋아하는 트로트도 실컷 부르고, 네가 제발 부르지 말라고 사정사정하던 트와이스 노래도 불렀는데, 그래도 심심한 건 그대로더라. 노래할 때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3월에 운동할 겸 DDR을 샀는데 아직 한 번밖에 안 해봤어. 내 몸이 나한테 협조를 안 해주더라고.     


  달고나 커피? 당연히 만들어 봤지.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저었는데 살짝 꾸덕꾸덕해지기만 하는 거야. 그래서 인터넷에 찾아봤더니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리면 따뜻해져서 금방 된대. 너도 꼭 해봐. 왜냐면 그거 다 뻥이거든. 전자레인지에 돌렸더니 아예 액체 상태로 되돌아오더라. 그래서 그냥 울면서 우유에 타 먹었어.     


  사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면 종종 네 생각이 나. 네가 사준 에코 백, 네가 추천해 준 한 사이즈 작은 원피스, 내가 “레몬 씻은 물 냄새”가 난다고 했지만 네가 억지 부려서 샀던 향수… 하여튼 별로 쓸모없는 물건이 많이 보여. 차라리 블루투스 마이크를 사 주지. 그럼 내가 네 앞에서 트와이스 노래도 안 불렀을 텐데. 찌릿. 찌릿.     


  아직도 우리 엄마는 하루에 한 번씩 “요즘엔 J 만나러 안 나가냐”고 여쭤 보셔. 건망증이 심하시거든. 그럴 때마다 헤어졌다고 말하긴 하는데, 요새는 그냥 너 만나러 간다고 뻥치고 PC방이나 갈까? 싶기도 해. 우리 PC방 자주 갔었잖아. 총 게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크레이지 아케이드하고, 그러다가 네가 내 캐릭터 죽이면 삐쳐서 얼굴도 안 쳐다봤었는데. 이젠 크레이지 아케이드도 나 혼자서 해. 몬스터 모드도 다 깼어. 그땐 인정 안했지만 네가 다 이겨 놓은 게임 내가 실수해서 진 적 많았는데… 지금은 내가 너보다 더 잘할 걸.     


  맞다, 너 며칠 전에 우리 ‘크앤(게임상의 애인)’도 끊었더라? 치사하게, 말이나 해 주지. 아무튼, 난 잘 지내고 있어. 너, 내가 자취하고 싶다니까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겠냐고 비웃었지? 웃기지 마. 나 이제 배달 앱에서 귀한 사람 대우받아. 우리 동네에는 아직 1인분만 배달해 주는 가게가 없어서 혼자 2인분씩 먹거든. 너 옛날에 떡볶이에 치즈 넣을지 말지도 한참 고민하고, 실컷 주문하고 나서 “치즈 넣지 말걸!” 하면서 사람 귀찮게 했잖아. 이젠 나 혼자서 떡볶이에 치즈, 당면, 베이컨까지 추가해서 먹어.     


  솔직히 말할게. 이런 사태가 있기 전까진 나도 내가 집순이인 줄 알았어. 그런데 종일 집에 틀어박혀서 게임하고, TV보고, 커피나 400번 휘젓다 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 난 집순이가 맞았어. 응. 너 만날 때보다 지금이 낫다는 소리야.     


  “밥 한번 먹자”는 말 알지? 할 말은 없고, 딱히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을 때 하는 인사치레잖아. 너도 자주 말했었고. 근데 있지, 요즘 사람들은 “밥 한번 먹자” 대신 “코로나 잠잠해지면 한번 보자”고 말한대. 그러니까 J야, 코로나 잠잠해지면 한번 보자. 잘 지내!


*언유주얼 '방구석 공모전' 에세이 부문에 당선된 원고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