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변정정희
만나봤다.
변정 작가를.
왜?
그녀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지 같다면 그녀의 생각과 선택을 통해 나의 입장을 비춰보고 싶고.
다르다면 어디가 어떻게 무엇이 다른지. 내가 앞으로 때려치우지 않고 할 수 있는 무엇인가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어서.
참고로 변정정희 라는 이름은
'변'은 아빠의 성, '정'은 엄마의 성으로 사회적 통용 성명을 본인이 선택했다. 5년 전에 결혼했고, 딩크족이다.
※ 마음은 있으나 생물학적, 신체적으로 아기를 낳을 수 없어서 선택한 연역적 딩크족 아님.
신념만으로 아이를 선택하지 않은 참트루 리얼 딩크족.
2018년 8월, 불볕더위에 온몸을 내어주며 드디어 약속 장소인 작은 도서관 갈월당에 도착했다.
변정정희 부부의 보금자리이기도 한 이곳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참을까, 때려치울까를 고민했던, 어쩌면 현재진행형일 수도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참는 사람과 때려치운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끌리나?
처음 인터뷰 제의를 받았을 때 이 질문이 직업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사회에서 한 발자국 비켜 있는 부분이 있나 생각해보니 출산과 육아가 가장 큰 것 같더라.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때려치우고 내가 지은 이름을 가지고 사니까 그런 면에서 때려치운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직업으로 보면, 작가라는 일 자체가 일반적인 직장인과는 좀 달라서 애초에 나는 회사원으로서의 마인드를 가져본 적이 없다. 내게 참기와 때려치우기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좀 다른 개념일 것 같다.
Q. 직장에 소속되어 일한 적은 없었나?
막내작가로 시작했을 때 회사에 소속되어 일했다. 그때는 월급 개념이었다. 밤샘 작업이 비일비재한데 그걸 다 시급으로 주면 너무 많아지니까.
Q. 밤샘 작업이라니…. 그 일은 어떻게 하게 됐나?
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먹고살 걱정 없이 시를 쓸 만큼의 돈을 벌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며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래도 방송이 돈을 좀 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다. 방송 쪽을 좀 알았다면 처음부터 방송국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전혀 몰랐다. SBS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가장 먼저 합격한 곳이 교양방송을 제작하는 외주 제작사였다.
Q. 역시 드라마가 돈이 되는 건가?
물론이다. 돈이 된다. 드라마는 방송의 꽃이다. 그중 드라마 작가가 최고이고.
역시 매스미디어. 대중의 위대함이여.
Q. 거기서 얼마 동안 일했나?
3년 정도 일했다.
Q.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3년 동안 일했던 직장을 그만둘 때 두렵지 않았나?
그 회사에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정신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바로 이어서 라디오를 했는데 쉬는 시간 없이 달리다 보니 건강도 안 좋았고 다른 상황들과 겹쳐 그만두게 됐다. 그만두고 1년을 쉬었다. 제과제빵학원을 다녔지만 경제활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때 ‘이제 나는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한 것 같다. 방송은 자본주의의 결정체다. 그런 방송 체계에 너무 질렸을 때라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했다.
Q. 제과제빵학원을 다녔다고 했는데, 그 일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나?
요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빵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갔다. 제과제빵 자체는 재미있지만 업으로 삼기에는 힘들었다. 가령 빵 공장에 취직하면 새벽에 출근해 맡은 파트에서 똑같은 작업만 종일 하게 된다. 반죽이면 반죽, 성형이면 성형… 이런 식으로 말이다. 취미로서의 제과제빵과 업으로서의 제과제빵 은 달랐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것이다. 학원을 그만두고 6개월을 더 쉬면서 이제는 무리되지 않는 선에서 작가 일을 계속하자고 결정했다.
Q. 1년 쉬고 나니 글 쓰는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진 건가?
그렇다. 사실 쉬기 전까지는 열심히 살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딱히 뭐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Q. 내 친구 중 하나도 PD 하다가 그만두고 빵을 만들더라. 멋있어서 방송 일을 하는 사람도 많을 텐데, 방송 관두고 빵 만드는 친구를 보면 베이킹이 참 힐링이 되는 작업 같다.
혹시 베이킹파우더 말고 이스트를 넣고 발효하는 빵을 만들어본 적 있는지? 손에 반죽을 넣고 둥글리기를 하다 보면 빵이 되는, 그 순간의 느낌이 있다. 처음에는 그냥 설탕과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 반죽이었는데, 갑자기 단단해지면서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하는 느낌이다.
Q. 뭔가 심오하다. 생명을 품은 빵 같은 느낌이다.
맞다. 그런 느낌이다. 그 느낌에 반했다. 아, 이걸로 시를 써야겠다, 할 정도로.
Q. 다시 원래 질문으로 넘어가자. 방송은 자본주의의 꽃이고 그 체계가 싫다고 했다. 어떤 면이 싫었는지 자세히 말해 달라.
인간성이 없어지는 느낌이랄까? 방송은 시청률이 나와야 하니까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하다. 악마의 편집이란 말이 있지 않나. 실제로 그렇다. 방송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보이지 않는 프레임을 정하고 그 프레임에 맞춰 누군가를 짓밟아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체계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고, 빠른 시간 안에 그 일을 무조건 해내야 한다. 더 무서운 건 그 체계에 맞춰 변해가는 나를 자각조차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Q. 예를 들면?
건강 관련 프로그램의 출연자 중에 희귀병에 걸려 투병 중인 어떤 여성을 섭외한 적이 있다. 그분의 남편은 직장도 그만두고 아내를 케어하고 있었는데, 아내를 너무 사랑하니까 방송을 통해서라도 고치고 싶은 그 진심이 전해져왔다. 치료받을 수 있게 병원을 연결해드렸지만, 나는 정해진 프레임에 맞춰야 하는 사람이었다. 받을 수 있는 치료 A, B, C가 있다 고 하자. 환자에게는 A가 가장 좋아도 방송에서 보이는 장면, 즉 프레임으로는 C가 제일 좋다면 C로 가야 하는 게 방송 체계다. 출연자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고, 그 간절한 진 심이 느껴지는데 나는 그 마음을 100% 공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갈등이 크고 작게 매번 있었다.
Q. 아까 말한 ‘인간성이 없어지는 느낌’이 뭘 말하는지 알겠다.
방송에 나오고 싶어 하는 의사 중에 딱 봐도 ‘아, 저 의사는 치료에는 관심 없고 유명세 치르고 싶어서 왔구나’ 싶은 경우도 많다. 인터뷰할 때 의학에 대해 물어보면 메일로 보내라고 시큰둥하다가 촬영지에서 보면 자기 전담 코디를 따로 데려오질 않나, “작가님, 이 넥타이 색깔 괜찮아?” 하며 겉모습에나 신경 쓰는 거 보면 정말….
Q. 진짜 싫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방송을 위해서 아름답게 포장해야 하지 않나?
맞다. 그런 게 맘 편하지 않았다. 미리 협찬을 받고 그 홍보물의 효능을 전달하는 스토리를 짜기도 한다. 전에 본 적도 없는 홍보물의 효과로 건강해졌다거나 이뻐졌다는 식의 내용으로 짠다.
결국 돈이 된다는 건 상업적 이용 가치가 있다는 말이고, 상업적 이용 가치가 없다는 말은 ‘돈’이 생길 기회가 없다는 것 아닌가. 나도 역 시 본래의 가치가 변질되는 상업적 이용이 싫지만 그래도 벤츠는 타고 싶고, 강남 부동산 부자도 되고 싶다. 이해하기 싫지만, 이해가 되기도 해서 더 씁쓸하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