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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Sep 23. 2021

와인색 싱크대와 교도소 현관문

스무 번째 이사

이사를 하고 나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셀프 인테리어! 전세도 아니고, 월세 세입자 주제에 예쁜 집에 살고픈 욕망은 억누를 재간이 없다. 보증금이나 월세가 저렴하면서도 위치가 좋은 집을 구하려다 보면 결국 노후된 집을 고를 수밖에 없게 되는데, 어른들 말처럼 결혼도 안 했는데 '대충'살면 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어릴 적 기억 탓이 크다. 주차장에 딸린 작은 집에서도 올바른 어른으로 잘 컸지만, 더 이상은 그런 환경에서 나를 자라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바스락 거리는 새하얀 호텔 침구, 하얀색 타일과 깔끔한 줄눈, 아이보리 색의 티끌 하나 없는 벽지, 헤링본 패턴으로 조각난 원목 타일형 장판, 은은하게 비치는 조명들. 월세 50만 원 언저리의 세입자가 상상해보는 한낱 꿈일 뿐이지만 어차피 안되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잡지에, 티브이에 나올 법한 집처럼 고칠 수는 없어도, 상처 받은 마음을 안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집의 온기가, 나를 따땃하게 데워주는 정도의 셀프 인테리어 정도는 해야겠다. 아니해야만 한다. 건물주가 원상 복구를 원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까 누가 봐도 이전보다 이후가 훨씬 나을 정도로 말이다.




도배는 비싸고 벽지 페인트가 정답이다.

월세 세입자는 최초 입주 시에 도배나 장판을 요구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도배나 장판을 해주는 집을 발견하는 건 거의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체로 집주인들은 '벽지나 장판은 깨끗하니 그대로 쓰시면 된다'라고 하니까. 그래도 임대차 보호법을 들먹이며 요구를 해볼 순 있겠지만, 사실상 의무도 아닌 데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세입자 조기교육 덕분에 '눈치껏' 사는 데는 도가 텄으니 대충 넘어간다. 대신 벽지에 벽지 페인트를 바른다거나 현관문, 싱크대 등 시트지 시공을 허락받는 정도는 미리 말해두는 것이 좋다. 나는 수만 가지의 알레르기 보유자다. 새집 증후군은 물론이며, 먼지, 고양이, 강아지, 온도, 꽃가루, 복숭아, 견과류 등등... 언니가 새로 지은 빌라에 이사를 했다. 언니네 집에서 며칠을 머물던 밤, 기도가 막혀 응급실에 간 적도 있다. 그래서 페인트는 항상 친환경 페인트 '벤자민무어'란 브랜드를 이용한다. 금세 마르기도 하고 냄새도 없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 가격은 일반 페인트들 보다 비싸지만 이사를 다닐 때마다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페인트를 셀프로 바를 때 어려운 곳은 바로 천정. 작년 강원도 집에 이사를 할 때는, 희한하게도 온 벽이 편백나무로 되어있었다. 묘하게 찜질방 같기도 하고, 산속에 통나무집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하필, 안방에는 꽃무늬 벽지가 발려있는 것이 아닌가. 가끔 의아하다. 집을 짓고 시공을 하는 사람들은 유난히 꽃무늬를 좋아하는 건지. 아님 시공을 맡기는 건물주들이 꽃무늬를 좋아하는 건지. 아님 연세가 있으신 분들의 취향은 꽃무늬로 대동단결하는 건지. 우리가 모르는 어른들의 세계인 건지. 아무튼 그래서 안방은 도배를 하기로 결정했다. 절반은 편백나무 패널로 되어있어 자칫 잘못하다간 나무에 페인트가 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에 페인트가 묻으면 건물주가 싫어할 것이 명백하니까.

흰색 혹은 아이보리 정도의 컬러로 벽을 칠해두면 빔프로젝터로 방구석 영화관을 만들 수 있다. 나는 매일 흰 벽에 프로젝터를 쏘아 콘텐츠를 본다. 셀프 페인팅은 조금의 수고로움과 비용이 들지만, 2년 동안 삶의 질을 꽤나 올려준다. 이사와 셀프 인테리어를 수도 없이 한 경험자로써, 정말이지 세상에 바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무늬 벽지가 없어졌으면 하고.




꽃무늬 벽지엔 페인트가 답입니다. @2014 성산동








셀프 페인팅이 그냥 커피라면, 문고리는 TOP

셀프 페인팅이 필수라면, 문고리는 아이템이다. 벽지 페인트는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다 바르기 전 여기저기 튀지 않도록 비닐을 깔고, 테이프를 붙이는 일까지 손이 많이 간다. 최대한 깨끗하게 발라도 바닥에 튄 페인트를 지워야 하고, 페인팅 후 정리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하지만 벽을 마무리했다면 바닥은 적당한 러그나 데코 타일로 분위기를 내면 오래된 집에도 어느 정도 괜찮은 분위기가 난다. 그리고 나면 콘센트나 문고리 정도를 갈아준다면 새로 인테리어를 한 집처럼 변신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입주 시에 도배를 해주는 주인을 만나 벽지는 무늬가 없는 흰색으로 부탁을 드릴 수도 있고, 정말 드물게도 센스 있는 주인을 만나게 된다면 올 화이트의 깔끔한 도배된 집을 맞이할 수 있다. 실제로 19년도에 성산동에 이사를 할 때는 건물주님께서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 천정, 벽지, 싱크대 모두 올 화이트로 수리된 집에 입주할 수 있었다. 덕분에 문고리와 콘센트만 갈고 편히 살았다.

콘센트를 갈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반드시 마른 고무장갑을 끼고 작업해야 한다는 것. 몇 년 전, 콘센트를 갈 때 콘센트 갈기를 여러 번 해봤기도 하고,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방심하는 바람에 맨손으로 젓가락을 들고(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커버를 빼고 넣다 감전이 돼서 기절할 뻔했다.(다행히 살짝 전선에 스친정도라 기절까진 안 했지만) 문고리는 교체를 한 뒤 오래된 문고리는 반드시 보관을 하도록 하자. 번거롭기는 하지만 이사를 하는 전 날, 문고리를 다시 원래대로 교체해놓고 다음번에 이사 가는 집에 그대로 들고 가서 교체를 하면 된다.







문고리는 TOP @2020 강원도






와인색 싱크대와 교도소 현관문

사주를 봤다. 평생 다른 사람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야 할 팔자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자라면서 점점 이타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보다 내가 좀 불편한 게 낫고,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더라도 내가 먼저 배부른 것보다 상대방이 먼저 배부른 게 낫다. 이런 성격을 악용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 그 덕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이런 성격을 고칠 수는 없었다. 고치고 싶지도 않았고.

시트지 작업도 같은 맥락일까. 문고리는 아이템이니 내가 도로 가져가면 되고, 벽지 페인팅은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면 새로 도배를 하면 그만인 1회용이지만, 콘센트나 시트지 작업은 도로 가져갈 수도 없는 일이라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셈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사실 이타심보다는 와인색 싱크대를 보며 2년을 살 수 없는 예민한 감각 때문이다. 작년 강원도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싱크대 시트지 작업을 했는데 남편은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와인색 너무 예쁜데 왜 흰색 시트지를 바르는 거야?"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게, ...? 이런 컬러와 분위기를 괜찮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역시 내가 예민한 거였구나. 그래도 어쩔  없다. 2 동안 와인색 싱크대에서 내가 음식을 하고 시선을 둬야 한다고 생각하면 공황장애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2014년에 현관문 시트지 작업을  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매일 문을 열고 출퇴근을  때면 마치 교도소출퇴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트지 작업은 건물주에겐 말도 하지 않았다. ' 봐도 비디오' 이게 훨씬 나으니까. 행여나 건물주가 눈뜬 봉사 타입의 감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심술쟁이 타입이라면 그까짓 시트지  떼고 와버리면 그만이다. 요즘 시트지는 두께도 두껍고 고급스러워서 떼는 것도 한방에  떼어지니 집주인 눈치를 보며 걱정할 필요도 없다. 대신 작업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당신의 !







빨간색 싱크대는 용서할 수 없어 @2020 강원도


현관문 시트지 셀프 인테리어 @2014 성산동




깨알 Tip!

못을 박아 액자를 걸어도 될까, 조명등을 교체해도 될까, 건물주에게 하나하나 다 전화해서 물어봐야 할까... 처음엔 이런 고민들이 제일 많다. 나름대로 쌓인 노하우를 전수하자면


못 : 시멘트 벽에 못은 마음대로 박는다. 대신 이사를 나갈 때 철물점에서 못 구멍 충전재가 있으니 그걸 사서 바르면 된다. 하지만 화장실의 경우 타일 위로 못을 박아야 하니 타일이 깨지거나 원상복구가 어렵다. 화장실은 못보다는 접착식을 사용하도록 한다. (집주인에게 고지할 필요 X)

조명&콘센트 : 천장등이나 콘센트는 교체하고 이전 것을 잘 보관해뒀다가 이사를 나올 때 원상복구를 시키면 된다. 하지만 천정은 보통 시멘트가 아닌 합판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구멍을 내고 기존 조명으로 다시 달았을 때 구멍이 보이고, 천정이 약해질 수 있으니 사이즈가 최대한 비슷한 조명으로 교체하도록 한다. (집주인에게 고지할 필요 X)

시트지&벽지페인트 : 시트지도 원상복구가 가능하고 쉬운 작업이라 집주인에게 고지할 의무가 없다. 내경 우, 최초에 이사를 들어갈 때 벽지 페인트나 시트지 작업 정도를 해서 깨끗하게 살고 싶다 라고 하면 No라고 하는 주인은 없었다. 그러니 계약서 작성 시에 미리 한마디 정도 곁들이거나 계약서에 특약으로 써두는 것도 좋다.

장판이나, 도배, 샷시 처럼 시공이 필요한 내용은 집주인과 반드시 상의해야 한다.



도배와 장판, 세입자가 한다?
전세의 경우 집주인이 도배와 장판을 해주고 월세의 경우 세입자가 하도록 법에 정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월세나 전세는 모두 임대차의 한 형태이고, 민법에서는 임대인에게 ‘임차인이 주택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어야 할 의무’를 주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도배, 장판이 쓸 만한 수준이라면 전세이든 월세이든 집주인이 굳이 해줄 법적 의무가 없다.
출처 :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102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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