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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Oct 19. 2021

서울이 싫어서

스무 번째 이사

스물여섯, 언니와 함께 사당동으로 이사를 했고 그즈음 나는 회사를 관뒀다. 같이 살던 친구들은 강남에 터를 잡았다. 그러면서 나 역시 자연스레 강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유명 연예인이 운영한다는 청담동 술집, 강남에서 핫하다는 압구정 로데오의 스포츠 바, 셀럽들이 많이 산다는 아파트 단지 옆 공원, 역삼동 호텔에 있는 클럽에서 친구들과 모임을 했다. 하지만 내가 사는 집은 사당동의 태평 백화점 뒤 빌라 집성촌, 수십 년도 더 되어 보이는 붉은 벽돌의 빌라였다. 알루미늄 현관문이 여닫을 때마다 삐걱,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집에선 라면을 자주 끓여먹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쁜 옷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해도 그들의 삶을 흉내 낼 수는 없다는 것이 점점 더 크게 와닿았다. 강남의 호화스러운 문화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싫었다. 강남도 싫었고 서울도 싫었다. 그리곤 얼마 못가 대구로 내려가버렸다. 그때, 나는 제일 친한 친구들도 잃었다.


일 년여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땐 마포구로 이사했다. 동교동의 빌라는 방은 정말 정말 좁은데 월세가 60만 원, 기본 관리비 6만 원, 전기세 가스비는 별도. 최소 70만 원이 드는 집이었다. 그때 월급이 세후 180 정도였다. 남은 110으로 학자금 대출 매달 30만 원, 핸드폰 요금, 실비보험, 밥값, 술값에 쇼핑까지 하면 터무니없이 모자라서 자꾸만 통장잔고에 구멍이 났다. 홍대라고 해서 강남의 물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결국 경기도에 살고 있던 언니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에어컨도 없고 창도 복도에 난 구조였던 산본의 빌라는 시원한 바람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 언니와 월세를 반반 부담하긴 하지만 보증금과 대부분의 생활비는 모두 언니가 부담했다. 언니 덕분에 금전적으로는 숨통이 트였지만, 지옥철로 출퇴근을 시작하면서 내 마음은 늘 환기를 갈망했다. 금정역에서 1호선을 시작으로 신도림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고 한 시간 남짓 걸려 출퇴근을 시작했다. 야근을 하고 돌아오는 금요일 마지막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날엔 늘 우울했다. 옆자리 술 취한 아저씨는 오줌을 싸고, 건너편 술 취한 대학생은 자리에서 토를 했다. 구역질이 나서 옮긴 옆 칸에서도 또 다른 옆, 옆 칸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다음 날, 출근을 위해서 또 전철을 탔다. 머리가 아프고 숨이 막혀왔다. 꽉꽉 들어찬 지옥철 안에서 나는 공포감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산소가 부족한 기분이 들어 몇 정거장 가지 못하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헛구역질을 몇 번 하고, 다시 다음 지하철을 타야 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출퇴근길을 반복하다 어느샌가 퇴근길, 눈물이 뚝뚝 흘렀다. 정말, 이렇게 계속 숨 막히게 살아야 하는 건지 막막했다. 다시 올라온 서울은 여전히... 잔인하고 야박했다. 그 날이후로 내 꿈은 잘나가는 디자이너가 아닌, 지옥철을 타지 않는 것, 출퇴근이 없는 삶을 사는 일로 인생의 목표를 수정했다. 언니는 산본의 집을 마지막으로 결혼을 했고, 나는 다시 홍대로 가서 2년을 혼자 살았다. 그리고 또다시 서울이 싫어 통영으로 떠났다.


그렇게 두 번이나 서울이 싫어서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이 년 뒤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이 싫어서 자꾸 떠나는데 떠나고 나면 다시 서울이 그리워서 자꾸만 돌아왔다. 한 번이면 실수, 두 번이면 습관, 세 번이면 돌이킬 수 없다고 했나. 세 번째로 서울에 올라오는 날은 다짐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이번에야 말로 서울에 터를 잡고 서울 사람이 한번 되어보겠다고. 그 후로는 서울에 정을 많이 들였다. 동거인이 생겼고, 마포구를 사랑하게 되었고, 영원히 이렇게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마음도 생활도 많이 안정적이 되었다. 이렇게 복잡한 이사의 역사를 함께한 꼭지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내가 바쁘고 집에 없을 때면 같이 사는 동거녀 민철이가 살뜰하게 꼭지를 챙겨줬고 산책도 잊지 않고 해 주었다. 그렇게 꼭지는 서울의 마지막 감나무집에서, 내 품 안에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곁을 떠나기 하루 전날에도 꼭지는 바깥세상 냄새를 맡고 싶어 했다. 걷지도 못하는 꼭지를 끌어안고 나가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꼭지는 나와 같이 산책하던 거리의 가로수 냄새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꼭지가 떠나고 난 뒤 허전한 방에는 민철이가 꽃을 사다 꽂아주었다. 남자 친구는 꼭지의 자리는 이제 자기가 채워주겠다며 늘 나를 만나러 와주었다. 그렇게 그 자리는, 그 거리는 슬픔이 아닌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언제나 야박하기만 했던 서울의 날들은 점점 소중한 추억들로 바뀌어갔다. 결국 나는 꼭지의 자리를 채워주겠단 남자와 다시 서울을 떠났지만, 서울이 언제나 그립다. 애증의 세월을 보냈던 서울, 유난히 야박했던 서울, 하지만 곳곳이 따뜻함으로 남아버린 서울. 미워도 하고, 사랑도 했다. 언제나 떠나고 싶어 하면서 언제나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렇게 우리는 또 이별했다.


서울을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했던 모든 이사의 순간을 함께한 까만 눈이 참 예쁘던 꼭지를 기억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언제나 보고 싶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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