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샌드가 좋아서 그랬어

by 고도리작가

딸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요즘 부쩍 외모에 관심이 많아 주말마다 쇼핑 타령이다.

아직 5월인데 갑자기 날이 더워졌다. 아이는 서랍에서 여름옷들을 꺼내 입어본다. 밤마다 내일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하는 건지 서랍장 온갖 옷가지들을 다 꺼내 놓고 정리는 하지 않아 방바닥에 옷이 수북하다.

거의 1년 만에 반소매 옷들을 입어보더니 다 작다고 난리다.

그리고 결론은 '입을 옷이 없어'

제발 그냥 입을 옷이 없는 걸로 끝내자. 다음 말은 하지 말아 줘.


"엄마, 우리 쇼핑하자"


소용없다.


"쇼핑하자 응?"

"무슨 쇼핑을 또 해? 저번 주에 했잖아"

"그건 윗옷이고, 반바지가 다 껴!!"



하긴 키가 많이 크긴 했다. 반바지 입은 폼을 보니 살짝 작은 듯 낀다. 다리가 길어진 만큼 바지 길이도 짧아져 그냥 입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쇼핑가기 싫은데... 주말에 사람들도 너무 많고 쇼핑가기 정말 싫다. 게다가 몇 번 기분전환 겸 백화점을 데려갔더니 이제 아웃렛 옷을 입지 않으려고 한다.

주말에 사람들한테 시달리지도 않고 백화점 옷도 살 수 있는 방법. 인터넷 쇼핑을 하면 모두 해결되겠다 순간 생각했으나 다시 마음을 고쳐 먹는다.

막상 옷을 받았는데 맘에 안 들면 또 쇼핑가자고 할 테고 그럼 나는 같은 일을 두 번 해야 한다.



결국 나는 주말 연속 쇼핑을 해야 할 판이다.

돈도 돈이지만 매번 주말에 쉴 수가 없으니 짜증이 난다.

"일단 알겠고, 너 이번 주에 수학 숙제는 다 해 갔어?" 밑도 끝도 없이 쏘아붙인다.

국어시간에 배웠던 글의 오류중에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엄마는 네 옷 산다고 돈 쓰는데 너는 뭐 하고 있냐?는 치사함도 깔려있다. 사주려면 그냥 사줘야지

"다 했어!!"

"너 또 선생님한테 전화 오게 하면 진짜 혼난다. 알았지?"

"알았어!!"

그러더니 아이도 밑도 끝도 없이

"그리고 나한테 뭐 사줄 때만 좋아한다고 하지 마. 사람이 어떻게 항상 똑같아. 엄마도 나 영어책 읽을 때만 예뻐하잖아!!"하고 팽 돌아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한참을 아이가 사라진 복도를 응시한다.



아이들은 알고 있다. 다 커버린 딸. 아기 땐 말랑말랑 그렇게 귀엽더니 지금은 어느덧 엄마처럼 커서 옷 타령이나 하는 딸을 늘 대면대면 대했다. 그러다 오랜만에 영어책 좀 집중해서 읽는다 싶으면 오버해서 '와 오랜만에 재밌게 읽네? 아이고 이뻐라'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는데...

엄마 마음속에 무언가 조금이라도 걸리는 순간들을 아이들은 제 마음속에 다 담아둔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두다가 이렇게 속상한 일이 생기면 갑자기 터트려 그 사실을 확인시킨다.


갑자기 어떤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나도 그랬는데, 나도 엄마가 나한테 그랬는데...



땅콩샌드



내가 어릴 때는 제과점이 별로 없었다. 있긴 했지만 제과점 빵은 비쌌다.

나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제과점 빵보다 유통기한이 더 길고 가격도 훨씬 싼 빵을 먹었다.

나는 땅콩샌드를 좋아했다. 식빵 사이에 살짝 땅콩 맛이 나는 크림 한 덩이가 들어 있는 두툼한 빵.

땅콩샌드 만드는 공장 풍경은 대충 이러지 않을까?

식빵이 하나씩 일정한 간격으로 컨베이어 벨트에 놓여 있다. 땅콩크림이 나오는 튜브에서 미리 입력해 놓은 용량만큼의 땅콩크림이 빵 위로 철퍽 떨어진다. 그 위에 또 한 개의 식빵이 놓인다.

그러다 보니 빵에 크림이 얹어진 모양이 제각각이다.

중간에 살포시 예쁘게 놓이거나 식빵 가장자리에 집중적으로 떨어져 겉에 잔뜩 묻어 있거나.

그래서 빵 봉지를 뜯자마자 식빵 사이 크림 모양을 확인하고 다시 덮은 후에 빵 전체에 골고루 크림이 묻도록 식빵을 양손바닥으로 꾸욱 눌러줘야 한다. 그래야 어디는 빵맛만 나고 어디는 크림맛만 나는 참사를 막을 수 있다.

가격에 비해 양도 많고 맛도 있고, 나는 땅콩샌드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 날은 엄마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엄마와 함께 가게에 들른 나는 땅콩샌드를 사달라고 했다. 엄마는 저녁 먹어야 한다고 했다. 저녁 먹을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긴 했다. 나는 조르기 시작했다. 슈퍼 주인이 보고 있었다.

'저녁 먹어야 하는데. 저 크림 덩어리 먹고 나면 밥을 안 먹을 텐데 그래서 사주면 안 되는데.'엄마는 갈등한다.

엄마는 슈퍼 주인의 시선에 굴복한 걸까?

그 날 신나서 땅콩샌드를 먹고 있는 나에게 엄마는 비수를 날렸다.

"너는 뭐 사줄 때만 좋아하더라"

입술 언저리에 땅콩크림을 묻히고 있던 나는 부끄러워 뭐라 할 말을 잃었다.


그놈의 땅콩샌드. 그놈의 땅콩샌드가 뭐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투덜대다가 뭐 하나 사줄 때나 좋아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두툼한 빵 한 덩이에 신나 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다니...

원망스러운데 엄마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고 내가 잘못했나 본데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럼 좋아도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아니면 별 좋을 일 없어도 맨날 웃으라는 건가?

좋아서 그런 건데 신나서 그런 건데 엄마가 미웠다.


나는 병에 걸렸나 보다. 망각(忘却)

부모들이 특히 아이들에게 더 심한 병증을 보이는 망각이라는 중병이다.

내가 당한 대로 딸에게 그러고 있었다니.

좋아서 그런 건데.

맨날 학원 빠지지 마라. 집에서도 영어책 읽으라는 엄마 잔소리에 좋을 일 없다가

예쁜 반바지 하나 생긴다니 좋아서 그런 건데.


그날 늦은 밤 아이방을 찾았다.

아이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다가 엄마를 쳐다본다.

아이에게 사과를 했다. 아까 엄마가 미안했다고, 엄마가 잘못한 거라고.

뽀로통하게 "응"하는 아이

더 어릴 적 아이는 엄마의 사과를 웃으면서 용서해 주곤 했다. "괜찮아 엄마"하면서

그래도 아이는 여전히 엄마에게 관대하다.

부끄러웠다. 매번 반복되는 내 부족함이. 매번 반복되는 아이의 관대함이.

부모들은 평생 이렇게 아이들을 키우려나 보다. 매번 실수하면서 매번 아이에게 용서받으면서.

오늘 사건의 교훈은 망각이라는 핑계로 잊어버리지 말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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