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의 꿈, 빨간 구두 한 켤레

by 고도리작가

아이들의 검정 패딩 열풍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내년에는 유행하지 않을 것 같다면서도 올해 기어이 비싼 검정 패딩을 산 딸을 보니 열풍은 열풍인 모양이다싶.

초등 5학년의 끝자락인 딸아이는 이제 슬슬 사춘기님이 오시는지 부쩍 외모에 관심이 많다.

아침이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긴머리 휘날리며 폼나게 등교한다. 검은색 이어폰을 끼고 검정 아디*스 후드티에 검정 롱패딩까지 올블랙 패션을 선호한다.

보다.


요즘 유행하는 롱패딩은 메이커가격도 디자인도 천차만별이다. 얼핏 보기엔 그냥 다 검정 롱패딩이지만 로고가 어떤 크기로 어느 부분에 들어가느냐가 다르고 주머니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 앞섶도 그냥 지퍼냐 찍찍이냐 단추냐 등 등 복잡하기 짝이 없다. 나름 간지나는 것은 인터넷으로 구입해도 40-50만원을 훌쩍 넘는다.


그래도 우리딸은 착하다. 처음부터 사달라고 조른 것도 아니고 추워지기 시작하자 내가 입다가 옷걸이에 걸어두고 방치한 메이커도 아닌 패딩을 한동안 입고 다녔다.

이젠 제법 키도 많이 커서 웬만한 엄마옷도 거의 다 -약간 헐렁하게- 입을 수 있을 정도라 입혀 보니 생각도 안 한 핏이 나서 꽤나 보기 좋았다. 와 돈 굳었네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학교 친구들이 하나둘씩 패딩을 사 입고 오는걸 보니 저도 좀 부럽긴 했나 보다.

엄마옷 안쪽이 다 뜯어져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으니 꿰매 달라고 해서 보니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의 상태로 꽤 오래 입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좀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 아이를 두고 엄마는 돈 굳었다고 좋아하고 있었다니 미안하기도 하고


'옷이 좀 그러네. 롱패딩 하나 사야겠다.' 그랬더니'정말?' 하면서 아주 좋아서 난리가 났다.

자기 롱패딩은 디스커버리나,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필라 중에서 사고 싶단다.

아이들이 입고 오는 옷들을 유심히도 살펴보았는지 1초도 망설임 없이 사고 싶은 메이커를 줄줄 읊는 아이

'그러자. 너무 비싼 거 사지 말고 20만원까지는 허락해줄게' 했는데 웬걸

저가 입고 싶은 디스커버리 올해 신상은 40만원이라면서 눈물 줄줄 흘리고 있다.

그래도 한번 뱉은 말이 있는데 딸내미 눈물 한 번에 흔들리면 안 된다는 근거 없는 신념에 버티다가 아이는 그다음 날에야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와~와~'를 연발하는 아이. 아이가 행복해하니 나도 행복하다. 그냥 바로 사줄걸


아이를 키우다 보면 참 돈이 많이 든다.

그래도 남들 하는 것만큼 해줄 건 해줘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내가 후회하게 된다. '그때 해줄걸' 하면서

작은 돈이 들든, 큰 돈이 들든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 과거 6-7살의 내가 떠오르곤 한다.


그 때 내 눈을 사로잡았던 빨간 구두 한 켤레

너무나 신고 싶었던 빨간 구두 한 켤레

키가 작아 손에 닿지 않는 신발장 제일 위칸에 두어 볼 수는어도 신지는 못했던 빛나는 빨간 구두




나 어릴 땐 에너멜 재질의 빨간 구두, 하얀 구두 들을 그렇게 신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요즘 검정 롱패딩처럼 선풍적인 열풍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그 시절 오랜 기간 동안 어린 소녀들은 학교 입학식 같은 큰 행사가 있으면 그런 비슷한 구두들을 다들 신고 왔다.

나 다섯 살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가 재혼한 10살까지 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나는 어릴 때 참 궁색했다. 게다가 우리 할머니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절 어른들은 어디서 얻어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칙칙한 색의 운동화만 신겼다.

신발에 대한 선호랄 것도 없이 그냥 내 운동화는 현관에 하나 있을 뿐이었다. 아무 고민도 감정도 없이 신발을 스윽 신곤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3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가 연출된다.


아이가 고개를 뒤로 바짝 젖히고 신발장 제일 위칸에 반만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 빨간 구두, 바닥의 까만 고무면에 자잘한 가로줄이 새겨져 있는 빨간 구두를 보고 있다.

어찌나 신고 싶은지 그 자리에 숨도 안 쉬고 서서 빨간 구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하면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작은 고모나, 작은 아빠가 할머니 집에 얹혀사는 어린 조카가 안쓰러워 날씨 풀리면신으라고 그 문제의 빨간 구두를 사주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빨간 구두의 주인이 된 그 작은 아이는 마치 부잣집 아이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듯 싶다.

그래서 마르고 달도록 신다가 작아져서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냥 한번 신어본게 다였다.

한번 신어 본 할머니는 무슨 일 있을 때만 신으라면서 아무 때나 신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려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기라도 하지 왜 할머니는 현관 신발장 제일 위칸. 그러니까 신발장 내부 제일 위칸, 문을 닫으면 보이지 않는 곳이 아니라 문을 닫고 신발장 제일 위와 천장 사이 그 위칸에 두었는지 오며 가며 먼지만 쌓여가는 빨간 구두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아마도 할머니가 말한 그 무슨 일이란 소위 결혼식이나 나들이 같은 것을 말하는가 본데 그 당시엔 결혼식도 없었고 어른들이 나들이도 데려가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 후 한참이 지나서 다시 꺼 빨간 구두는 이미 내 발에 작아져 신을 없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헛웃음이 나온다. 허탈하고 어이없다. 어른들이 원망스럽다.

그때 나는 헛웃음도 원망하지도 허탈해하지도 못했다. 어린 들은 어른들을 향해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더 잘해야 한다. 아이들은 자기가 어른들한테 무슨 일을 당했는지 잘 모른다. 잘 표현하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더 잘해야 한다. 속상하지 않게...


나는 그 빛나는 빨간 에너멜 구두를 그렇게 보내버렸다. 그렇게 허탈하고 어이없게

부쩍부쩍 크던 나는 몇개월 후 좋은 날씨에 그 구두를 신어 보았을 때 이미 작아져서 겨우겨우 발을 구겨 넣을 수 있을 뿐이었다.

나도 그 구두신고 살랑살랑 다니고 싶었는데.. 어린 소녀의 소박한 꿈은 무심한 어른들 덕에 덧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 구두를 신으면 잠깐이라도 우리학교 잘난척 하던 예쁜 애들처럼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꿈을 깨고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들은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났다. 넘치도록 해주진 않아도 부족하게는 하지 말아야지

처럼 우리 아이들도 30년이 지나도록 잊혀지지 않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장면 하나 있다면 무척 속상할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하얀 운동화만 신는 딸아이

매주 운동화를 빨 수도 없고 오늘은 새로운 하얀 운동화 하나 더 사줘야겠다.



이전 03화땅콩샌드가 좋아서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