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한 리듬에 기대어
하루를 마치고 늦은 저녁이 돼서야 세탁기를 돌린다. 부엌 불을 줄이고 욕실 문을 반쯤 열어 둔다. 드럼통 문이 닫힐 때 나는 둔한 자석 소리, 세제를 붓는 동안 가루가 물에 눅눅하게 눌리는 질감, 버튼을 누른 뒤 잠깐의 정적을 지나 찾아오는 깊은 웅음. 집 안에 다른 소리는 거의 없다. 이 시간, 우리 집은 세탁기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인다.
바닥에 앉아 책을 펼친다. 발바닥으로 미세한 진동이 오른다. 드럼통이 천천히 도는 첫 구간, 거품이 얇은 띠를 만들고, 띠가 문창 유리 가장자리에서 별처럼 흩어진다. LED에 찍힌 숫자는 56, 55, 54로 내려간다. 숫자는 줄어드는데 마음은 오히려 늘어난다. 둔한 리듬이 긴장을 받아내고, 그 위에 문장들이 안착한다. 빨래는 안으로, 나는 안쪽으로.
세탁기는 주기를 바꿔가며 말수가 줄어든다.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돌고,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읽을 때 몸도 비슷하게 움직인다. 한 단락을 넘기고 눈을 들었다가, 다시 페이지로, 다시 바깥으로. 텍스트와 소리가 한 음절씩 엇물리다 어느 순간 같은 속도로 간다. 그때 문장 속 여백이 더 또렷해진다. 거품 사이의 어두운 틈처럼, 단어들 사이에도 톤이 다른 간격이 있다. 오늘은 그 간격에 몸을 기댄다.
세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물이 꽉 차오르고, 거품이 커다란 대륙처럼 뭉친다. 드럼통의 둥근 창이 한 장의 세계지도로 변한다. 한쪽에서 떨어져 나온 흰 조각이 다른 조각과 합쳐지고, 가장자리의 미세한 파문이 다시 중심으로 빨려 들어간다. 페이지 위에서도 비슷한 모양을 본다. 문장 끝에서 흘러나온 작은 의미 조각이 다음 문단의 중심으로 옮겨 붙는다. 이 시간의 독서는 이해라기보다 유통에 가깝다. 뜻이 포개지고 분리되는 방식을 먼저 본다.
헹굼 구간으로 넘어가면, 세탁기는 물을 바꾸며 짧게 숨을 들이쉰다. 웅— 하는 낮은 음이 한 톤 내려가고, 물줄기의 성격도 달라진다. 나는 책을 덮지 않고 여백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러본다. 종이는 습기 도는 공기에서 아주 미세하게 부풀어 오른다. 오늘의 문장들도 그렇게 삶 쪽으로 조금 부풀어 오르면 좋겠다. 내용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닿는 면적이 넓어지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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