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사이 문장 하나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알람보다 먼저 깨어 창문을 열어 보니, 하늘은 젖은 천처럼 낮게 늘어져 있었다. 베란다 난간 위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톡—’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기분을 가라앉힌다. 오늘의 계획은 그대로지만, 마음의 속도는 알아서 반 박자 느려진다. 주방에서 커피포트 물을 끓여두고, 스탠드 불을 낮게 켠다. 빛이 테이블 위로 둥글게 내려앉는다. 그 둥근 자리를 오늘의 창틀로 삼는다.
비 오는 날엔 책을 집어 들기 전에 먼저 소리부터 고른다. 도로 위를 지나가는 차가 물을 헤치며 내는 ‘쉬이—’ 소리, 버스가 정류장에 가까워질 때 내뿜는 깊은 숨, 건물 처마 아래에 모여 떨어지는 작은 물줄기. 일상의 소리들이 빗소리의 군더더기를 닦아 준다. 나는 컵에 따뜻한 물을 붓고, 책을 천천히 펼친다. 표지의 물기 같은 광택이 오늘은 조금 더 말랑해 보인다.
창문에는 김이 얇게 오른다. 손바닥을 가만히 대면 둥근 온기 하나가 분홍빛으로 번졌다 사라진다. 그 옆에 검지로 물방울 하나를 따라가 본다. 굽었다가 곧아지는 작은 궤적. 책장을 넘기는 일도 비슷하다. 직선으로만 가지 않고, 잠깐 굽었다가도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첫 문장을 입술 안쪽으로만 더듬으며 따라 읽는다. 소리 없는 낭독. 마음이 문장 안쪽으로 살짝 기대어 앉는다.
비가 소리를 키울 때가 있다. 꼭대기층 통유리 위로 요란하게 떨어지거나, 옆집 에어컨 배관을 타고 큰 방울이 툭툭 떨어질 때. 그럴 때면 시선을 잠깐 창밖으로 뺏긴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인도 위에 동그란 별을 만든다. 지나가는 발소리가 그 별들을 부수고 지나가면, 별은 금세 다른 자리에서 다시 생긴다. 읽기라는 것도 조금은 그런 일 같다. 부서져도 곧 만들어지는 길, 사라져도 조금 옆에서 다시 나타나는 모양.
책 속의 사람들은 오늘도 한 발씩 걸음을 옮긴다. 낯선 도시의 골목에서 길을 잃고, 카페 구석에서 오래 앉았다가, 집으로 돌아와 손을 씻는다. 그 문장들이 내 창문 앞에 내려와 겹친다. 비는 내리고, 전선은 젖고, 흰 우비에 번지는 점들이 많은 말보다 정확하다. 나도 한 줄을 따라가다 말고 컵을 들어 올린다. 김이 안경알에 얇게 닿는다. 이 정도의 방해는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오늘의 속도를 다시 일깨워준다.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동네 소리가 조금 바뀐다. 배달 오토바이가 속도를 줄이는 소리, 편의점 문에 달린 종이 두 번 울린 뒤 닫히는 소리, 유모차 바퀴가 물길을 가르는 소리. 나는 책갈피를 옮겨 끼우며 ‘오늘의 단어’ 하나를 정한다. 오늘의 단어는 ‘사이’. 물과 물 사이, 빗소리와 빗소리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사이가 있어야 형상이 생긴다. 사이가 있어야 비가 비답고, 글이 글답다. 책의 여백이 눈에 먼저 보이는 날이면, 나는 덜 조급해진다.
잠깐 나갈 일이 생겨 우산을 폈다. 현관을 나서며 한 번 뒤돌아본 테이블 위에는, 펼친 책이 얌전히 숨을 고르고 있다. 계단을 내려가면 건물 현관 유리문을 가로지르는 물의 선들이 있다. 그 선은 언제 봐도 비슷한데,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오늘은 바람이 약해 선들이 꽤 곧다. 나는 그 꽂ꂂ한 모습을 눈에 넣고, 길거리의 물웅덩이를 피해 걷는다. 신발 바닥이 젖을 때 나는 ‘찍’ 소리는 낮지만 선명하다. 그 소리를 밟으며 마음속에서 방금 읽은 단락을 한 번 더 걷는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비 냄새가 잠깐 벗겨진다. LED 조명이 종이와 플라스틱 위에서 반짝거린다. 결제하고 나오는 길에 비가 잠시 약해진다. 그 사이에 나는 다시 책의 한 줄을 꺼내 본다. 한 문장이 내 안에서 아주 작은 우산이 되는 느낌. 온몸을 가려 주진 않지만, 고개 하나는 충분히 가릴 수 있다. 그 정도면 다시 걷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창문에 맺혔던 물방울이 방향을 바꾸어 아래로 길게 흘러 있다. 가늘게 이어진 실선 하나하나가 오늘 읽어야 할 분량처럼 보인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 실선 중 하나를 마음으로 잡는다. 페이지도 그에 맞춰 천천히 넘어간다. 바깥의 속도와 안쪽의 속도가 합의를 보는 순간. 합의는 보통 조용하게 이루어진다.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나머지는 비가 알아서 해 줄거다.
오후 내내 비가 간헐적으로 쏟아졌다가 쉬었다가 한다. 그 리듬에 따라 책 읽기도 잠시 멈추었다가 이어 간다. 어떤 문단은 물처럼 금방 스며들고, 어떤 문단은 표면을 잠깐 맴돌다 뒤늦게 흘러들어간다. 나는 조급함이 올라올 때마다 창틀 위에 손을 올린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작은 온도. 그 사이에서 문장은 방향을 찾는다. 방향을 찾는 건 늘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진다.
해가 기울 때 빛은 한 톤 더 어두워지고, 방 안의 물체들이 제 그림자를 다시 가진다. 책상 모서리의 그림자, 컵 받침의 그림자, 접힌 페이지 귀퉁이의 그림자. 그림자는 물기와 잘 어울린다. 물이 흐르는 곳에 그림자가 붙으면, 모양이 또렷해진다. 나는 그 또렷함을 빌려 마지막 단락을 읽어 나간다. 그리고 연필을 들어 오늘의 단어를 옆 여백에 작게 적는다. ‘사이.’ 글씨가 조금 번지지만 괜찮다. 번지는 것도 비다운 일이다.
저녁이 되면 비가 약해진다. 우산을 접는 소리들이 멀리서 간헐적으로 들리고, 도로 위 물결이 낮은 빛을 받아 느리게 흔들린다. 나는 책을 덮고 표지 위를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 준다. 종이의 마찰감이 오늘의 끝을 알려 준다. 머릿속에서 몇 줄이 반짝였다가 사라진다. 사라지는 줄과 남는 줄의 차이를 굳이 따지지 않는다. 물방울이 유리에서 떨어질 때 어디에 닿는지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듯, 문장도 가끔은 목적지를 나몰래 스스로 고른다.
불을 끄기 전, 창문을 조금 연다. 바람이 커튼 가장자리를 살짝 들어 올린다. 비 냄새가 방 안으로 아주 얇게 스민다. 그 냄새는 흙냄새처럼 구체적이면서도, 오래된 책장 냄새처럼 추상적이다. 나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하루를 정리한다. 많이 읽은 날도 아니고, 특별한 문장이 있었던 날도 아니다. 다만 물방울과 물방울 사이에서,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문장 하나를 붙잡아 보았다는 것. 그 하나면 충분하다.
침대에 눕기 전, 창틀에 손바닥을 한 번 더 올려 본다. 낮보다 차갑다. 그런데도 마음은 조금 따뜻하다.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책은 비를 멈추게 하지는 않지만, 비 사이의 간격을 보게 한다. 그 간격을 보거 있노라면 급하지 않다. 서두르지 않으면 더 멀리 간다. 나는 눈을 감고 낮에 적어 둔 단어를 마음으로 한 번 더 읽는다. ‘사이.’ 내일 비가 그치든, 더 내리든, 그 단어는 내일의 모양을 조금 바꿔 줄 것이다.
물방울 사이 문장 하나를 건너듯, 나는 천천히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