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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하이영v May 31. 2024

나는, 괜찮지 않았다

아니, 다들 약속이라도 했나, 우리도 좀 아이를 가져보자 하니 여기저기서 임신 소식이 들린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나이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아이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당연한가. 아니지, 임신 소식이야 종종 있어도 내가 아이를 기다릴 때 듣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 소식들에 내 소식이 없으니 이렇게 투덜거리는 게지.


한때 친했던 동생의 소식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우선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것에 놀랐다. 연인의 존재가 아니라 상대가 너무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와 결혼하고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시기 그녀의 넷째 소식을 들었다. 인구절벽의 시대에 얼마나 희소식인가. 하지만 그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소식도 이어졌다. 본인의 선택이니 왈가왈부할 것도 없다. 나의 소식을 들은 그녀는 기다리는 언니한테나 가지 왜 본인한테 오냐며 한탄했더라. 그녀도 자신의 상황과 선택이 아프고 쉽지 않았겠지만 이미 삐뚤어진 내 맘은 썩 달갑지 않았다. 그냥 이야기를 안 들었으면 좋았을걸. 그 뒤 우연히 내가 사는 동네에서 마주친 그녀는 그저 반가웠다. 늘 웃어주던 그녀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도 쓰리고 괜히 그녀의 남편 탓도 들고. 당시 셋째의 돌이라 해서 얼른 근처 대형마트로 데려가 사줄 수 있는 옷을 냉큼 사줬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마음이 한결 편했다.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넷째의 소식이 들려왔다. 모쪼록 아이들과 복작복작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바란다. 암 그래야지. 그런데 나는 왜 안 생기지?


우리 부부는 남편의 직장동료와 계획하에 신혼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 신혼여행지로 의견이 갈리는 상황에 내가 원하는 여행지로 제안이 오니 무조건 콜이지.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다녀온 후 각자 결혼생활을 하던 중 그 부부의 임신 소식이 들렸다. 이 커플도 아이를 기다리고 있으나 소식이 없어 고민이라는 이야기가 들리더니, 쌍둥이란다. 와! 세상에! 쌍둥이! 진짜 너무너무 부럽더라. 아이가 생긴 것도 부러운데 쌍둥이라니. 단순히 임신 소식이 부러운 것보다 쌍둥이라서 너무 부러웠다. 하나도 생기기 힘든데 둘이라니! 나에게는 쌍둥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심지어 아이 엄마와 쌍둥이가 식사하는 만화 장면이 너무 좋아서 이미지로 간직할 정도였다. 머 철부지라도 할 수 없다. 사람은 현실이 닥치기 전에 이상을 생각하니까. 서로 굉장히 노력했다고 들었다. 우리도 노력은 하는데 왜 안 생기지? 노력이 아니었나?


남편의 오랜 친구네는 부부 갈등이 많다고 했다. 결혼을 약속한 후 서로의 갈등으로 파혼하고 재결합 하여 결혼에 이른 그들이다. 결혼 후에도 싸움은 계속됐다. 그런데 아이가 생겼다네? 신기했다. 그래도 저 부부는 그렇게 싸워도 아이는 잘생기네. 그런데 우리는 왜 안 생기지?


결국 돌고 돌아서 드는 생각은 우리는 왜 안 생기지? 이유를 생각해 본다. 물론 우리 부부는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다. 이 생물학적 이유는 확률이다. 이 이유에 미련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임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우리 부부는 얼마나 노력했을까. 괜찮다 하면서도 주변의 임신 소식은 미련에 불을 지핀다.

임신을 막 준비하는 시점에서 들려오는 아이 소식들은 나도 곧 생길 거라는 기대감에 부푼 설렘이다. 좋은 것을 보면 나도 그리하고 싶은 마음. 기다림이 길어지면 그 소식들은 두려움과 불안함이다. 이대로 계속 안 생기면 어쩌지.


이런 두려움과 불안함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반드시 마주해야 할 내가 있다. 부정적인 나의 모습. 그냥 부정적이지 않다. 나의 자격지심, 열등감, 질투, 시기들이 다 나온다. 나라고 완벽한 인간은 아니지만 사람은 그런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스리며 산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나오기 시작할 때 스스로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다스리기 쉽지 않다. 알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나 자신에게도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마인드 컨트롤? 아, 쉽지 않아.


누가 나 괜찮다고 했냐? 나요, 나. 심지어 글을 쓰기 전까지도 나는 참 무난하게 괜찮게 의연하게 지나갔다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던 나다, 새삼 글로 풀고 있자니 새록새록 기억난다. 이런 나를 마주하고 있으니 한없이 초라하다. 내 인생에 고작 아이라는 존재 때문에, 하지만 고작으로 절대 표현할 수 없는 존재.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남편을 따라간 모임에서 만난 그 언니는 유난히 자기 남편을 좋아하던 언니였다. 결혼해서 집에서는 늘 같이 있었을 텐데, 뭐가 그리 좋은지 모임에서도 남편에게 팔짱을 끼고 딱 붙어 있던 언니라 눈에 띄었다.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 곧 친해지고 밖에서 따로 만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나와 성격이 맞지 않았다. 점점 연락이 뜸해져 있을 즈음 언니의 임신 소식을 들었다. 내 앞에서 임신을 준비한다면서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을 해서 종종 잔소리했었다. 그런 그녀가 임신을 하니 나의 마음속 시커먼 것들이 또 올라오더라. 아니, 저 사람보다 내가 훨씬 더 건강한 것 같은데 확률적으로 내가 더 잘 돼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저 언니가 하는 해로운 것들은 다 하지도 않잖아, 왜 나는 안 생기고 언니는 생기는 거야? 괜히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왈칵 났다. 아, 참 못났다. 이때 좋지 않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다 튀어나온다. 부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남편을 또 원망하고. 이런 내 모습에 더 화가 났다. 그 뒤 그녀의 안타까운 아니, 너무 슬픈 소식을 연달아 들어서 나는 혼자 울었다. 후회와 자괴감. 나는 정말 괜찮지 않았다.


목욕탕 이모님들이 아이를 가지려면 질투하고 샘을 내야 된다고 했을 때, 나는 뭐라고 했나. 그런 생각이 들어야 머 샘을 내지 했던가. 부끄럽다. 이미 충분히 차고 넘쳤다. 이모님들, 샘을 내라면서요. 이제 보니 너무 샘을 내서 삼신 할매가 아이를 안 줬나.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내가 이렇게 자격지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이렇게나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었나, 마음의 여유가 이리도 없었던가. 다른 사람들이 뭘 하든 딱히 상관없었는데, 왜 이렇게 상관일까.


아이는 그렇다. 긴 기다림에 때로는 무너진다. 그들은 생판 남이 아니다. 그래서 죄책감이 더 크다. 좀 더 축하해줄걸, 좀 더 보듬어 줄 걸. 다시 후회다. 하지만, 어떡하리. 시기를 하고 질투를 하고 의식을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결국 지나간다. 그런 감정들은 24시간 그러지는 않더라. 그들이 낳은 아이들도 너무 귀엽고, 그런 아이들을 보며 다시 설레는 것도 좋다. 중간중간 밉고 못난 내가 고개를 들어 왁왁하지만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반성할 것은 반성하면서 자신을 달래고 마음을 잡아보자. 마음이 힘들 때 좀 울고 다시 잡으면 된다.


다들 아이가 생기기 전에 놀아야 한다고 했다. 언제든 아이가 생기면 못 하는 것도 많으니 반드시 그러라고 한다. 치! 자기들은 아이가 있으니 그런 말을 하지. 하지만 맞는 말이니 놀자 놀아. 아이가 없는 내내 울고만 있을 수 없다. 계속 눈물로 나를 가두면 내 인생이 얼마나 가엾나. 한 번뿐인 귀한 내 인생인데. 이겨낼 필요도 없다. 내 감정을 인정하고 힘들어도 그냥 나를 마주하자.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착각도 좀 해주고, 그러면 괜찮다. 다 과거가 될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때만 조금 들춰보자.


거창하지만 그래도 그냥 살아남자.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그랬으면 좋겠다. 아이보다 본인을 더 먼저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그래야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힘들고 눈물만이 전부가 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도 즐기고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이러나저러나 인생은 후회를 반드시 남으니 그중 하나라도 지웠으면 좋겠다. 나 또한 당연하다.


뻔뻔하지만 어떠하리. 나는 내가 제일 소중해. 아이참 부끄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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