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는 못 본 척하고 싶어도 못 본 척하지 못하는 게 많다. 어쩔 수 없는 것들, 눈에 거슬리는 것은 너무나 많다.
나는 이럴 때 2가지 방법을 쓴다.
바로 공허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공허를 위해 어둠을 덮거나, 정적을 덮는다.
이 글에서는 그중 정적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 나는 정적이 좋다. 정적 속에서 내 행동만이 소리를 내는 게 좋고, 예상되는 소리가 예상되는 곳에서 퍼지는 게 좋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실에서, 선반에서 컵을 달그락 꺼내서, 탁자에 턱 하고 내려놓아, 컵에 우유를 꼴꼴꼴 붓고, 커피스틱을 칙 뜯어서, 커피를 주룩하고 부은 뒤, 라떼가 잘 만들어지도록 숟가락으로 표면을 저어낼 때 들리는 도록도록 소리가 좋다. 사방이 조용하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에 음자취가 남는다. 일종의 발자취다. 나는 반복된 행동으로 어떤 소리가 내 행동에 따라붙을지를 이미 알고 있다. 그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편안함이 좋다. 그 고요, 적막, 정적이 좋다.
내가 정적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건 몇 년 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잘은 모르고 긴가민가하다. 어렴풋이 '어. 나 생각보다 적막을 좋아하는 거 같은데.' 정도로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여전히 헷갈리는 이유는 오랜 시간 적막해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가난하면 적막한 상황에 둘러싸이기란 정말 어렵다. 일단 집 밖이 조용하지도 않을뿐더러, 집 안도 항상 시끄럽기 마련이어서 길어도 반나절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괜히 내 선호에 의심이 드는 거다. 그냥 적막을 악상 중 쉼표 정도의 느낌으로 좋아하는 건 아닐까? 전체가 비어 있고, 가끔 소리가 나는 게 좋은 게 아니라, 많은 소리 속에서 몇 개 있는 쉼표가 좋은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렇다면 확인을 해봐야겠는데... 그렇지만 확인하려면 돈이 드는군. 패스!
그러다가 최근 노이즈캔슬링 헤드셋을 샀다. 헤드셋을 끼고 노이즈캔슬링일 키면 대부분의 소리가 먹혀 들어간다. 내가 평소에 들었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행동했는데 행동만 남고, 소리가 따라 붙지 않는다. 모든 소리를 평등하게 다 덮어 없애버리겠다는 무자비함이 좋다. 어쩔 수 없이 싫어하는 소리를 벗어날 수 없을 때 자주 쓴다. 공평하게 내 소리, 네 소리 전부 다 먹어버려서 만들어 낸 인공적 적막.
원하지 않는 소리에 자주 노출된다면, 쉽게 내가 있는 장소를 바꿀 수 없다면 노이즈캔슬링 헤드셋을 구매하는 걸 정말 추천해주고 싶다. 장소를 구매하지 않아도, 빌리지 않아도, 몇 십만원으로 적막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렸을 때 이 제품이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구매했을 것이다.
어릴 적 내 작은 방은 얇은 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거실에서 손님들이 술을 마시는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는 방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바깥의 모든 소리를 공유했다. 나는 완전한 나의 세계로 가지 못하고 영혼의 반쯤은 거실로 끌려나갔다. 시험기간에 상관 없이 집은 늘 시끄러웠고 이어폰은 그렇게 효과적인 대안이 되지 않았다. 어렵게 잠에 들어서야만 타인의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 나에게 적막은 독립된 공간을 보장하는 부유의 상징이었고, 나는 그것을 넘볼 수 없었다.
지금은 예전보다 적막을 빌리는 방법이 다양해졌다. 도서관을 방문하거나, 청년센터를 방문하거나, 스터디 카페를 이용하거나, 1일 스테이를 하면 고요한 곳에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적막과 고요를 실컷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든지 자신이 있는 곳을 조용히 만들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자유와 쉴 틈을 줄 것이다.